클래식 환자 인증 제 1법칙-내가 같은 연주회를 두 번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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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현식의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이 코너 명색이 ‘클래식 환자일기’인데 나는 무슨 환자같은 짓을 했나 지난 한 해를 반성(?)해 보았다. 평균 1주일에 한번 꼴로 공연을 가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약한 것 같고… 그러다가 1월 첫주에 같은 공연을 두 번 연달아 보게 되었다.
1월3일(수)와 5일(금)의 크리스티안 짐머만 피아노 독주회였다. 처음부터 어떤 굳은 의지를 갖고 똑같은 연주를 두번 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예매 시점에는 1월 첫주에 회사 업무사정이 어떨지 몰라서 안전을 위해 두 날짜 다 예매한 것이었다. 두 날짜 중 하루는 연주하는 곡이 좀 다르거나, 아니면 롯데콘서트홀 vs 예술의전당으로 장소라도 다르겠거니 하는 생각도 있었다. 같은 곡으로 다른 공간에서 연주를 하면 짐머만의 피아노 사운드를 좀 더 다각도로 음미해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장소도 연주 곡목도 똑같다는거 아닌가. 하나는 취소할까도 고민을 했다. 누가 표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그렇고…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이틀 다 보기로 했다. 몇가지 이유(라 쓰고 핑계라 읽는다)가 있었다.
1. 내가 컨디션이 계속 좋을 수 없다. 중간중간 꿈나라에 순간이동으로 다녀올 수도 있다. 두 공연 다 가면 설마 같은 대목에서 졸진 않겠지.
2. 짐머만의 컨디션이 다를 수 있다. 여독/시차적응/ 감기/ 미세먼지 등등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3. 내가 잘 모르는 곡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 연주로 한번 더 들어보면 그만큼 더 잘 알게 되겠지.
4. 내가 아는 곡이라면, 그가 어떻게 다르게 치는지, 아니면 똑같이 치는지 귀기울이고, 연주하는 동작도 좀 더 자세히 보자.
5. 같은 홀이라지만 내 자리가 다르다. 아랫층과 위층의 소리를 같은 연주로 비교해 본 적은 아직 없으니까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다.6. 하루는 취소하고 그 돈과 시간을 아낀다고 해서 짐머만의 공연을 보는 것보다 더 유익하게 쓸 것 같지 않았다. 술이나 더 먹겠지 뭐.
과연, 같은 장소 같은 곡목으로 이틀을 들어보니 그의 음악을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시마노프스키 <폴란드 민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짐머만의 연주로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변주곡 피날레 부분에서 짐머만은 거의 같은 타이밍에 거의 같은 높이로 왼쪽 다리를 들었다가 내려밟으며 건반에 체중을 실었다. 역시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동작이었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특정 기간에 어느 음악가의 실연을 집중 감상하면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단단한 연대감 같은 게 생긴다. 게다가 짐머만에 대해서는 좀 더 특별한 감정이 든다. 내가 판을 처음 사던 80년대 초반부터 음반 표지에서 보던 음악가들 중에 전성기의 기량과 외모에 가장 근접하게 유지되고 있는 사람이 아마 짐머만일 것이다.
노쇠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지금, 볼 수 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보아두고 싶다. 폴리니처럼 늙는다는 건 연주자 자신에게나 오랜 팬에게나 너무 슬픈 일 아닌가.
다음에는 일본 공연도 미리 가서 보고 한국에서 또 보는 식으로 중복감상을 해볼까 싶기도 하다. 그쯤되면 ‘환자’라는 자부심도 더욱 커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