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은 파리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히스테리를 이겨냈던 것 같다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고흐의 히스테리적 흔적에 관하여

파리에서 고흐의 화풍이 바뀐 것은
라캉식 '히스테리' 개념으로 볼 수 있어

"고흐는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새로운 전환을 경험
이전에는 나르시시스트적 태도와 강박적인 성향으로
주변 환경을 조절하려 했지만
이제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1886년 2월의 마지막 날, 학적을 두고 있었던 앤트워프의 왕립미술원을 뒤로한 채 고흐는 파리로 향했다. 몽마르트에 있는 동생 테오의 집에 머무는 동안 줄곧 밝은 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물랑 들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를 그렸다. 같은 제목으로 세 편이나 작업했다. 언뜻 보아서는 마치 인상파 작품 같다.

고흐의 그림은 파리 생활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진다. 전에는 주로 어두운 색감과 두꺼운 붓질이 주된 특징이었다면, 파리 생활을 시작하면서 밝고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 찼다. 전반적으로 생동감이 넘치고 활기찬 느낌을 준다. '물랑 들 라 갈레트' 세 편은 모두가 가벼운 색채와 함께 자유로운 고흐를 느끼게 한다.
「물랑 들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1886년)
반 고흐 「물랑 들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1886년)
물랭 드 라 갈레트(1887년)

강박에서 히스테리로, 몸의 감각을 겪다

파리로 온 뒤로 고흐는 얽매이던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 가지 방식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강박증과 관련이 깊다. 강박증은 개인이 특정 행동이나 자기주장에 신경을 쓰되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반복적인 손 씻기나 세수, 과도한 정리 및 청소를 한다든지 특정 원칙과 습관이 고착되어 거의 탈진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고흐는 그동안 어둡고 두꺼운 붓질이라는 강박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고흐가 강박증에서 벗어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의 히스테리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교롭게도 고흐가 파리에 도착한 날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로이트가 남성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파리를 떠났다. 같은 날 파리 기차역에서 한편에는 29세의 프로이트가, 한편에는 32세의 고흐가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상상의 고리를 만들어 준다. 그것이 바로 히스테리로 보는 고흐의 파리 생활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무의식 개념을 발견하고, 그것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의 연구는 성별에 관계없이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시하여 심리학 및 정신분석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히스테리는 원인 불명의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다. 욕망을 억압하면 무의식에 남아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은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히스테리를 건강한 인간의 특징으로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히스테리적 인간은 우선 자기 주체성이 타인을 향한 욕망을 억압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 그 주체의 자리에 타자가 다시 들어오게 한다. 억압으로 상실된 욕망을 보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를 억압된 욕망의 결과 신체에 드러난 증상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라캉은 주체의 자리에 주체와 타자가 순환하면서 욕망의 억압과 해소가 반복된다고 보았다. 이런 히스테리적 인간이 솔직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파리에서 고흐의 화풍이 바뀐 것은 라캉식 히스테리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흐가 다양한 화가들의 기법을 탐구함은 그들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발전시킴은 타인에 대한 욕망을 억압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흐의 독자적인 화풍은 파리에서 갖게 된 라캉식 히스테리의 흔적이다.

고흐는 앤트워프에서 독한 수은제 치료를 받고 치아의 3분의 1을 마취도 없이 발치하고 난 후 자신을 해골의 모습으로 그렸었다. 그때까지 두꺼운 색으로 묵직하게 칠해야 한다는 강박은 그의 대인관계를 왜곡시키고 행동양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간절한 편지를 썼다. 파리에 있는 화가 페르낭 코르몽(1845~1924)에게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고흐가 당시 파리 예술가들을 열망한 것은 라캉이 말하는 히스테리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나서야 그 현상이 격렬하게 폭발했다.

고흐의 고흐들

고흐는 1886년 4월부터 코르몽의 스튜디오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이곳에서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퀘탱, 툴루즈 로트레크, 호주 출신의 화가 존 피터 러셀과 친분을 쌓았다. 로트레크와 러셀은 각각 고흐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들은 ‘페레’ 탕기가 운영하던 화구상점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세잔의 그림들도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점묘파와 신인상파가 나타나면서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냑의 대규모 전시회에도 참석했다. 고흐가 파리의 다양한 화가들과 교제하고 수많은 전시회를 찾으면서 그들의 화풍을 모방한 것은 분명히 그들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모방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물랑 들 라 갈레트' 세 편과, 또 이미 10년 전부터 인상파의 걸작으로 유명했었던 동일한 제목을 가진 르누아르의 작품을 비교해 봐도, 르누아르는 활기찬 무도회를 묘사했지만 고흐는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풍경을 표현했다. 이는 다른 화가들을 욕망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을 잃지 않으려는 히스테리적 흔적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고전의 거장들로부터 배웠지만, 이제는 동시대(contemporary) 작가들에게서 배우고 있다.” 고흐가 거장에게 배우던 지식은 이제 친구들에게서 얻는 지식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대 유행하던 인상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화풍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욕망하는 그 대상을 찾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을 잃지 않는 일을 반복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좋은 모습은 다양한 화풍을 이해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능력이다. 현재의 예술적 트렌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우물’에 빠져 동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외곬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다양한 화풍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넓은 관점을 소유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지 못할 때 타자를 욕망하여 어떤 유행을 수동적으로 맹종하거나, 아니면 주체에 대한 강박으로 무조건 거부할 것이다. 고흐의 경우 이제까지 따랐던 방식은 낯선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고흐는 앤트워프에서 잠시 맹종적인 삶을 살았지만 대부분은 욕망하는 대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 욕망을 억압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이 강박 때문에 늘 혼자라 외로웠고 우울과 불안까지 느꼈다. 때론 시골 사람들에게 과격하게 힘을 과시기도 했다. 그나마 드러낼 만한 힘마저 없다면 생색내기에 빠져서 ‘위하는 척’ 하다가도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상처를 받았다. 어찌 됐든 그런 상태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점점 더 외골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족과 사랑하던 여인들, 동네 사람들마저 숱한 충돌과 갈등으로 고흐를 외면했다.

하지만 자기만 옳다는 유별난 자존심과 강박이 사라지자 놀랄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말은 유연하지만 그동안 사고가 경직됐던 고흐에게 침착과 여유가 생겼다. 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욕망하는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말이고, 그것은 여유롭게 다른 사람의 생각에 유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고흐의 캔버스에는 고흐의 또 다른 고흐들, 그러니까 ‘고흐의 세잔’, ‘고흐의 로트레크’, ‘고흐의 쇠라’, ‘고흐의 시냑’이 표현되고 있었다.
물랭드라칼레트(블루트핀)의 테라스에서(1887년)

히스테리의 필연적 흔적 ‘실재의 표현’

고흐는 줄곧 색채와 대상, 그림의 완성과 관련하여 ‘실재’를 표현하는 정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흐는 이미 밀레 등을 통해 리얼리즘(realism) 화가들이 생각했던 그 ‘실재(reality)’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파리로 이주한 후에도 이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림으로 실재를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색채에 관한 한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져서 거의 준전문가였던 고흐는 어떤 색을 사용하더라도 실재를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고흐는 색채나 대상, 도구보다는 '실재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인상파나 점묘파의 방식 등 어떤 화풍을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실험적인 정신이 돋보인 「물랑 들 라 갈레트」를 시작으로 그의 화풍이 변화한 것은 이러한 고민과 관련이 있다.

파리에서의 고흐는 자신의 화풍을 내려놓고 동료들의 화풍을 모방하고 흉내 내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그동안 어둡고 무겁게, 덧칠로 표현했던 그의 화풍이 밝고 가볍고, 빠른 붓질로 변했다. 하지만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일한 느낌을 전하는 대신, 고흐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새로운 전환을 경험했다. 이전에는 나르시시스트적 태도와 강박적인 성향으로 주변 환경을 조절하려 했지만, 이제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자신이 사실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점묘파 등 모든 영역에서 인정받는 ‘관종’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랬더니 자신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줄어들면서, 고흐의 그림은 거북함과 폭력적인 강렬함이 사라졌다. '물랑 들 라 갈레트'에서는 풍차 근처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가 보인다. 이제는 그 시절이 지난 고흐가 상상 속에 있는 아이들의 행복한 ‘실재’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이 엿보인다.
몽마르트 거리 풍경(1887년)
그렇다면 우리가 강박증에 빠진 이유도 알 것 같다. 우리에게 ‘실재’의 것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한다. 누구에게는 시기심으로, 누구에게는 열등감으로, 또 누구에게는 괜한 ‘갑질’로 표출되지만, 억압한 욕망 때문에 일평생 결핍(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실재만 있다면 그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 블로그, 유튜브, 책,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오히려 적극 활용할 것이다. 표현할 실재만 있다면 표현할 것만 있다면 인상파이든 초현실주의이든 다다이든 추상표현주의이든 미니멀니즘이든 개념미술이든 그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을 고집하는 강박의 자식들이다. 고흐가 그랬듯이 실재를 고민하며 자기애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둡고 칙칙한, 마음 아팠을 감정의 찌꺼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렇다. 자유로운 영혼은 강박이 없다. 강박이 없는 그림은 보는 자를 자유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