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속의 임윤찬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고독을 견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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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수민의 커넥트아트
반 클라이번 콩쿠르 실황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 임윤찬이 했던 '말 말 말'
‘반 클라이번’ 2위·3위가 보여준 포옹도 화제
예술에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예술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고 선호하는 스타일이 다른데 과연 어떤 기준을 두고 점수화해야 하는 걸까요. 간혹 콩쿠르에서 수상을 거부하는 연주자들, 시상 결과에 반대의 의견을 강하게 내비치는 심사위원들을 보면 ‘예술의 점수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 위해, 동시대 예술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기 위해 콩쿠르에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꾸준히 존재합니다. 콩쿠르 무대에 오르는 음악가들은 언어가 아닌 음표로 자신을 표현해야 합니다. 즉흥적으로 툭 튀어나오는 결과물이 아닌 숙성을 여러 번 거쳐 농익을 대로 농익은 음악성, 시공간을 초월한 곳으로 관객들을 빨아들이며 무대를 장악해야 하죠.공기 중에 흩어지는 음표들이 관객들의 마음에 가닿는 동안 음악가들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런 궁금증과 갈증을 채워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했습니다. 그것도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화제였던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세세하게 담았습니다.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참가자들의 여러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크레셴도> 예고편
무대 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23년 12월 말, 헤더 윌크 감독의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레셴도>가 개봉했습니다. 전 세계 클래식 음악팬들에게, 특히 피아니스트 임윤찬 팬들에게는 연말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전 세계에서 지원한 300명의 지원자 중에서 뽑힌 30명 개개인의 스토리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릴 때 어떤 계기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부모님이나 스승님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음악계의 올림픽과도 같은 이 콩쿠르의 참가 동기는 무엇인지...
30명으로 시작한 1차 본선은 2차 본선에서 18명으로, 준결선에서는 12명으로, 결선에서는 6명으로 추려집니다. 콘서트홀에 모든 참가자들을 모아두고 다음 라운드 진출자를 호명하는 순간, 그들의 얼굴 위로 희와 비가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진출자는 실력순이나 이름 알파벳순이 아닌 무작위로 호명되고, 호명되는 순서대로 다음 라운드의 연주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긴장감과 어수선함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며 첫 번째 주자로 연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소리 없는 싸움이 다음 라운드 연주 순서를 정할 때부터 벌어지죠. 다큐멘터리는 점차 파이널리스트 6명을 렌즈 가까이에 둡니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겪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루는지, 무대에 입장하기 직전에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이는지, 무대 위에서 어떤 자세로 연주하는지, 다음 무대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어떤지 등 그들의 진짜 모습이 필터 없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번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는 ‘예술성, 테크닉, 기교, 드라마, 개성, 상상력, 짜릿함 등 모든 것을 갖췄다’라고 평가받은 임윤찬 군 뿐만 아니라 아직도 격전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각각 출전한 젊은 연주자 두 명에게도 이목이 쏠렸습니다. 안나 게뉴시네(러시아, 1991~)와 드미트로 쵸니(우크라이나, 1993~)가 그 주인공입니다. 특히 안나 게뉴시네는 출산을 몇 달 밖에 남기지 않은 임산부였기에 더 경탄스러웠습니다.
6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예술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했고 결국 안나 게뉴시네가 2위, 드미트로 쵸니가 3위를 수상하며 무대 위에서 진한 포옹을 나눴습니다. 그들은 예술이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어 평화와 화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것이죠.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의 이름을 딴 콩쿠르
때는 미국과 구소련이 한참 대립하고 있던 1958년. 러시아 음악의 모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러시아의 국민 작곡가인 차이콥스키를 기리기 위해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미국인 피아니스트가 우승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23세 미국인 피아니스트의 매력에는 만장일치로 빠져들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된 반 클라이번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었지만 반 클라이번(1934~2013)은 연주 스트레스 및 건강 악화로 인해 연주 활동을 점점 줄이게 됩니다. 이른 나이에 은퇴 선언 이후 고향에 칩거하며 살아가게 되죠.
짧았지만 화려했던 반 클라이번의 행적을 기리고자 1962년에 만들어진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그의 고향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리고, 18세부터 31세까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4년에 한 번씩 열리기에 콩쿠르에 참가하려면 신이 내린 타이밍도 도와야 하죠. 우승자는 상금 1억과 함께 음반 발매 기회, 3년 간 유명 홀에서의 연주 기회, 글로벌 매니지먼트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는 총 51개국 388명이 지원했습니다. 준결선에 진출한 연주자 12명 중 무려 4명이(김홍기, 박진형, 신창용, 임윤찬) 한국인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준결선 12명 중 결선에 오른 6명은 심사위원장인 마린 알솝과 포트워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야 하는데 임윤찬 군은 이 중 한 곡으로 ‘피아니스트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골랐습니다.
콩쿠르 결선 실황 영상
임윤찬의 말 말 말
18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60년 만의 최연소 우승자의 자리를 차지한 임윤찬 군은 콩쿠르 직후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아직 음악 앞에서 학생이기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에 제 음악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콩쿠르에 참가했다. 저의 꿈은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사는 것이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놀래켰죠.
다큐멘터리 속에서도 임윤찬 군은 울림이 깊은 말들을 남깁니다.
“스승님께서는 훌륭한 사람이 되면 세상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스승 손민수 교수를 여러 번 언급합니다.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매 라운드가 끝난 직후 인터뷰를 할 때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온 마음을 다해서 연주했어요. 하늘에 있는 작곡가들에게 바치는 연주였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그가 다른 참가자들과 차원이 다른 연주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곳에 있는 그의 영웅들과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고독한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음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게 음악가의 사명입니다.”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 청년은 앞으로 어떤 음악가로 성장할까요. 그의 고독함을 옆에서 그저 묵묵히 응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2022년 6월, 콩쿨 우승 직후 이루어진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