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종이 주워 쓰던 가난한 화가, "평화로운 풍경만 그리고 싶다"는 사연

갤러리바톤서 개인전 여는
빈우혁 작가 인터뷰
젊은 작가 대부분이 ‘있는 집’ 출신이라는 건 미술계의 공공연한 상식이다. 빈우혁 작가(43)는 드문 예외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집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 친구 집을 전전하며 눈치밥도 먹었다. 천신만고 끝에 제대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지만,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도 생계를 걱정하며 동료들이 버리는 종이와 목탄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런데 빈 작가의 그림은 또래 한국 작가 그 누구의 그림보다도 평온하고 고요하다. 전쟁 같았던 지난날과 정반대의 분위기다. 그는 지금 독일에서 거주하며 산책길과 연못 등 유럽 자연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빈 작가의 작품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는 마니아들도 생겼고, 국립현대미술관과 OCI미술관 등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국내외 기관도 늘고 있다.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멧돼지 사냥’을 계기로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빈 작가를 지난 17일 만났다. 그리고 그의 삶과 작품세계의 관계를 물었다. 작가는 “내가 겪었던 여러 괴로운 일들로 작품 세계를 포장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살아온 얘기를 들려줬다.

남이 버린 종이에 그린 그림

'Cliff face'.
어릴 적 그의 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서울 월곡동 달동네 방 한 칸에서 네 식구가 살았기에, 자기만의 공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친구 집에 몇 달씩 얹혀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눈치가 보였다. 지친 마음을 산과 들을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며 달랬다.다행히 그는 공부를 곧잘 했다. ‘가난한 집 애라서 공부도 못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악착같이 매달린 결과였다.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려대 인문학과에 입학했다. 서화(書花) 동아리에 들었다. 살 곳이 없으니 동아리방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 선배들이 밥과 술을 사 줬고, 밤이면 동아리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른 밥벌이가 그렇듯이. 하지만 빈 작가는 “이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힘들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그에게 늘 그림은 힘든 현실을 잊게 하는 치유의 과정이었다는 설명이다. 어려운 형편에 들어간 명문대까지 자퇴해 가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대학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그때부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당시 미술계 ‘대세’는 일종의 사회 비판의식을 작업에 넣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공격적인 주제가 너무 피곤했어요. 물이나 연못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 때입니다.”
'Osiris Pond'.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재료비가 없어 동료들이 버린 종이를 주워다 썼다. 물감 살 돈도 없어 가장 싼 재료인 연필과 목탄을 썼다. 그렇게 작가는 2010년대 중반까지 연필과 목탄으로 그린 작품들을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 지금도 그는 때때로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번 전시에도 그런 작품들이 몇 점 나와 있다. “나중에는 동료들이 캔버스 천을 버리더군요. 드디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빈 작가가 웃었다.

독일의 풍경에서 찾은 희망

'Uferwg'. 산책하는 길의 지표면을 그린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한 2013년 그는 독일로 떠났다. 그곳은 빈 작가가 꿈꾸던 이상향과도 같았다. 공기는 맑고, 풍경은 아름답고, 생활은 편리했다. 그를 괴롭히는 가족 문제도 없었다. 물감은 한국의 반값이었고 도처에 있는 미술관마다 거장들의 명작이 걸려있었다. 1년간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그가 4년 전 다시 독일로 가 정착한 이유다.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또다시 어려움이 찾아왔다. 2022년 여름, 끊임없는 작업을 견디지 못한 그의 어깨가 석회성 건염에 걸린 것. “그림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그림을 못 그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막막했어요. 정말 큰일났구나 싶었지요. 여러 치료를 받으면서 목탄 드로잉으로 감각을 유지했어요. 다행히 기적같이 어깨가 치료되면서 그 해 겨울 초입부터 다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전시 제목인 ‘멧돼지 사냥’이 그 때 그린 작품이다. 베를린 티어가르텐공원에서 받은 영감을 그려냈다.
'Die Eberjagd'(멧돼지 사냥). 이번 전시의 주제가 된 그림. 목탄 드로잉을 이어붙인 거대한 작품이다.
'Spirodela slate'.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언젠가는 평화로운 풍경을 그만 그리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제 마음 속에서는 과거에 겪은 일들, 아직도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일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는 건 그런 복잡한 마음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개인적인 어려움을 다 털어내고, 여러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재미있는 드로잉이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드로잉 묶음을 꺼내 보여주는 그의 눈이 빛났다. 전시는 2월 17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