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머니 룩'의 끝은 밀라노, 세계 최고 오페라 도시라는 증거들

[arte] 황지원의 오페라 순례
밀라노에 갈 때마다 산 바빌라 광장의 단골 남성복 매장을 찾곤 한다. 합리적인 가격에 이탈리안 테일러링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결정은 쉽지 않다. 이때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엘레나 파스키에리는 이곳 최고의 베테랑 매니저. 선택 장애를 겪을 때마다 내게 다가와 단칼에 정답을 제시해 준다. “48사이즈로 진한 네이비 색 자켓을 입고, 앞 단추는 반드시 풀어요. 그리고 항상 배우처럼 당당하게 걸을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답니다.”
이걸 밀라노에서는 벨라 피구라(Bella figura)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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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피구라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아름다운 자태’가 된다. 대개는 멋진 외모를 지닌 미남미녀를 가리키는 말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좀 더 복잡한 문화적 맥락이 있다. 상황과 장소에 어울리는 몸가짐과 정중한 태도, 삶의 전반에 넘쳐나는 우아한 행동양식을 의미한다고나 할까.

남자라면 낮에 무슨 일이 있었든 카페에 나타날 때는 잘 다린 셔츠와 바지, 광을 제대로 낸 구두를 신고 와야 한다. 여성들에게는 계절마다 어울리는 옷을 맵시 있게 갖춰 입거나, 친구의 기분을 헤아려 최적의 레스토랑을 추천하는 세련된 안목도 요구된다.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타인의 주목을 제대로 받고 싶어 하는 일종의 연극적인 열망에서 나온 행동 규칙들이다. 이러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교향악보다는 오페라에 강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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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리카르도 샤이가 세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 밀라노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의 음악감독이 되어 금의환향했다. 그는 취임 기념공연으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골랐다. 티켓은 이미 석 달 전에 매진. 공연 첫날 객석에는 이탈리아 총리 내외, 밀라노 시장 주세페 살라를 비롯한 고위관료들, 수많은 VIP와 셀러브리티들, 유력 일간지의 비평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리카르도 샤이
<투란도트>는 중국의 전설 시대가 배경이다. 남성혐오증에 빠진 투란도트 공주가 왕자들의 집요한 구혼을 물리치기 위해 세 가지 수수께기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참수 시킨다. 주인공 테너가 칼라프라는 본명을 숨기고는 공주의 수수께기에 도전한다. 그가 부르는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는 최고의 명곡이다. 파바로티, 안드레아 보첼리 등의 노래로 지금은 웬만한 뮤지컬 넘버 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예술의전당이 2013년 제작해 CJ토월극장 무대에 올린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공연 전 스칼라의 관객들은 극장 옆 유명 카페인 포이어(il Foyer)에 모여 비공식 프리뷰를 즐긴다. 이때 한 노신사가 은근히 말을 걸었다. <투란도트>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 어딘지 아냐는 것이다. 당연히 테너 아리아 ‘네순 도르마’ 아니겠는가? 아니, 그는 2막 피날레가 최고라 했다.
수수께기를 모두 맞춘 왕자가 공주한테 역으로 문제를 내는 장면 말이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새벽이 오기 전에 나의 이름을 알아내시오. 당신이 성공하면 나는 후회 없이 죽으리”라고 노래하는 장면. 노신사는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이탈리아식 프로포즈라고 불렀다.

막이 오르고 2막의 그 장면이 테너의 음성으로 흘러 나왔다. 간절하면서도 뜨거운 어조로, 그러나 너무도 당당한 눈빛으로 공주에게 구애의 수수께끼를 내는 왕자를 보며 온 몸에 알 수 없는 전율이 흘렀다. 로비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이 보였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나른한 자세로 먼 곳을 응시하는 신사가 있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앙증맞은 에스프레소잔을 멋지게 감아쥔 부인도 보였다. 모두가 오페라의 주인공 같았다.
역시 밀라노다. 이곳은 세계 최고의 오페라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