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 김동민의 뉴욕의 동네 음악가
음악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음악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대답은 디자인과 건축이다. 디자인 중에서도 화면이나 지면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반면 건축은 공간의 설계와 구성을 통해 어울림의 조합을 기능에 접목하는 분야이다 보니 평면 디자인과는 결이 다르다. 무엇이든지 상이 구현되는 곳에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면 미술이건 건축이건, 음악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3학년 미술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장래의 꿈을 그려보라고 하셨다. 고민 끝에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은 전선이 정신없이 얽혀있는 통 속에 앉아 시간 여행을 준비하는 김 박사의 모습이었다. 교내 발명왕 대회에서 배터리로 구동하는 미니 선풍기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상에는 아버지의 지분이 크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스위치를 누르면 날개가 돌아가는 하나도 창의적이지 않은 그냥 선풍기였다. 4학년이 되어서는 막 배우기 시작한 ‘나비야’ 때문인지 ‘내 꿈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제목으로 글짓기 숙제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아버지는 나를 바이올린 학원에 보내셨다. 긴 생머리를 한 소녀 같았던 선생님은 휠체어에 앉아서 수업을 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 때문에 양쪽 다리에 장애가 생겼고, 손으로 조작하는 특수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셨다. 선생님은 친절했고 모든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셨지만, 수업은 항상 꼼꼼하고 엄격했다. 얼마 후 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들었고 유학길에 오르는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가셨다. 그 선생님이 떠나고 큰 키에 호탕한 선생님이 오셨다. 이듬해 겨울, 새 선생님과 준비했던 예술계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한 후 바이올린을 그만두었다.
GettyImages1939년생이신 아버지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처음 접했다고 하셨다. 황량했던 시대에 경험한 서양악기의 신비로움은 어린아이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소원대로 두 아들 중 큰 아들은 당신의 업을 이어받아 현악기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바이올린을 때려치웠던 둘째는 비올라로 마음을 다잡아, 2년 후 음대생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에서 줄곧 살아왔던 스텔라는 스탠퍼드 대학 진학 대신 뉴욕행을 선택했다. 1년 동안 다니던 줄리어드를 포기하고 하버드로 학교를 옮겨 심리학을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진로를 정할 줄 알았던 그가 다시 줄리어드로 돌아와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박사 과정 중 경험 삼아 도전했던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깜짝 우승을 하더니 최근에는 링컨센터, 그라마폰이 주목하는 젊은 연주자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