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박석원 "쌓고 부수고 다시 쌓고 부수면서 겸허와 겸손을 배워요"

청년시절엔 전쟁 상흔에 분노
여든 넘으니 축적의 가치 탐구
"힘이 닿는 데까지 쌓아가려 해"
사진=연합뉴스
원로 조각가 박석원(82·사진)의 초기 화두는 ‘절단’이었다. 작가는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96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전쟁 직후 한국 사회가 품었던 시대적 상실감을 철 용접의 방식으로 날카롭게 풀어냈다. ‘황폐해지고 못쓰게 된 땅’을 뜻하는 ‘초토’(1967) 등으로 젊은 혈기를 표출했고, 회복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듯, 폐허가 된 땅에도 새로운 생명이 쌓여갔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작가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며 변했다. 1980년대 전후로 절단뿐 아니라 축적을 아우른 ‘적의(積意)’ 시리즈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최근 만난 박 작가는 “쌓고 부수며 다시 쌓는 행위가 지금껏 나를 끌고 왔다”며 “그 반복의 몸짓 자체에 생명이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석원 ‘적의(積意)-23069(2023)’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리는 박 작가의 개인전은 이처럼 ‘절단과 축적’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돌과 철, 나무, 한지 등 전통적인 소재를 반복해서 자르고 쌓아 올린 그의 작품은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속 인간의 위치를 조명한다.

‘한국 미니멀리즘 추상 조각의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만큼, 그의 작품은 대상의 원래 형태를 재현하는 데 무게를 두진 않는다. 사물을 극단적인 기하학의 세계로 단순화하면서 오히려 재료 본연의 자연스러운 성질을 부각한다.전시의 이름은 ‘비유비공(非有非空)’이다. ‘모든 법의 실상은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하다’는 뜻으로, ‘유(有)’와 ‘무(無)’ 사이 중도를 뜻하는 불교 용어다.

그의 작품이 표현한 자연은 완전한 정적 대상도, 동적 대상도 아닌 그 사이에 있다. 잘라낸 한지를 겹겹이 쌓아 올린 평면 작업에선 가로로 이어 붙인 한지가 지시선 주위로 불규칙하게 진동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석탑처럼 견고한 형상을 띤 ‘적의-15029’(2011)에서도 각각의 석재가 잘린 단면은 균질하지 않다.

“잔잔한 호수는 멀리서 봤을 땐 미동도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자연은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셈이죠. 인간이 배워야 할 겸허하고 겸손한 자세 아닐까요.”박 작가는 “조각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고 말했다. 심오한 철학적 배경과 추상 조각이라는 낯선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다.

조각가로서 60여 년을 보낸 박 작가의 작품세계는 앞으로 어디로 향할까. 전시장에 마련된 원으로 구성된 공간이 힌트다. 십이지신을 연상케 하는 석재 조각 12개를 원형으로 배치했는데, 각 조각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기울어 있다. ‘반대-화합-반대’가 반복되는 구성은 주변 공간과 조응하며 자연의 무한한 순환을 암시한다.

“저의 주제는 쌓는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나이가 쌓이고, 인간의 의식도 쌓이고, 또 이를 후대에 물려주게 되겠죠. 앞으로도 힘이 닿는 데까지 쌓아가려고 합니다.” 전시는 2월 24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