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월이 춤에 홀린 대금 명인들…조선총독부 잔치서 '연주 배틀'
입력
수정
지면A26
적로“절대(젓대의 방언)는 박종기요, 박종기가 절대로다. (···) 형님 소리 내가 알고 내 소리를 형님이 아오 /종자기 가고 나서 백아 줄을 끊었으니 /나와 형님 떨어지면 /서로 간에 소릿길을 누가 있어 짚어주며 /어디에 비춰보리?”
일제시대 유명했던 실존 음악인
박종기·김계선 '소리 인연' 다뤄
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개막한 음악극 ‘적로’의 도입부. 1941년 초가을, 오랜 경성(서울)살이를 접고 고향(진도)으로 돌아가려는 박종기(이상화 분)를 붙잡기 위해 부르는 김계선(정윤형 분)의 창(唱)이 애달프고 간절하다. 김계선은 ‘지음(知音)’ 종자기가 세상을 뜨자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는 백아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표현한다.배삼식이 극작, 최우정이 작곡·음악감독, 정영두가 연출·안무를 맡은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박종기(1879~1941)와 김계선(1891~1943)은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떨친 젓대(대금) 명인이다.
두 명인이 함께한 공식 기록은 두 사람이 같이 연주한 음반 목록 정도만 남아 있다. 배 작가는 이 목록과 김계선이 민속악 예술가들과 교류한 기록, 실제 행적 등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두 인물을 ‘지음지기(知音知己)’로 극화했다.
두 인물이 깊은 관계와 사연을 맺게 하는 가상 인물로 춤추는 기생 산월(하윤주 분)이 등장한다. 세 사람이 처음 만난 계기는 조선총독부에 고위 관리가 부임한 것을 기념해 열린 파티장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박종기와 김계선은 어떤 성격의 자리인지 안중에도 없이 경쟁적으로 연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리 배틀’을 벌인다.이 배틀 이후 동기(童妓)가 등장해 멋진 춤을 선보이는데 바로 산월이다. 두 명인은 산월에게 반하고, 산월은 젓대 소리에 반한다. 이후 산월은 기회가 될 때마다 두 사람을 불러 젓대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등 교류를 지속한다.
이후 두 명인이 산월에게 젓대를 처음 불게 된 과정과 자신의 인생·예술관 등을 각각 소리(唱)로 들려주는데, 극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이 음악극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작가의 상상력뿐 아니라 두 명인의 실제 삶이 배여 있어 감동이 배가된다.
다채로운 음악적 기법도 주목할 만하다. 두 젓대 명인은 소리꾼을 기용한 반면 산월 역의 하윤주는 노래로서 정악(正樂)에 해당하는 정가(正歌)를 부르는 가객 출신 배우다. 산월은 한문으로 된 가사를 정가로 부르다가 한글로 풀어 다시 노래한다. 반주는 대금과 아쟁, 타악기, 클라리넷, 피아노 등 국악기와 양악기가 혼재돼 있다. 공연은 27일까지.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