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 광고 못하는데…광고대행사 대표가 사외이사

소유분산기업 '짬짜미 경영'
(하) 전문성 없는 사외이사 리스크

민영화 이후 재직한 44명 중
교수·법조·정치인이 절반 이상

담배산업 모르는 비전문가들
경영상 중대 실책 예측 못해
'美 공탁금 미반환 위기' 불러

재단·기금에 자사주 무상 증여
경영진 지배권 강화 논란도
세계 1위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엔 11명의 사외이사가 있다. 모두 글로벌 기업의 현직 사장급 임원이다. 세 명은 구찌, 네슬레, 몬델레즈 등 글로벌 소비재 기업 소속이다. 핵심사업이 된 전자담배 기기 판매를 늘리기 위해 소비재 전문가들을 자문역으로 둔 것이다. 골드만삭스, JP모간 등에 몸담고 있는 자본시장과 투자 전문가들은 PMI 경영진이 미래 전략을 짜는 걸 도와준다.

KT&G의 사외이사 진용은 PMI와 영 다르다. 여섯 명 중 규모 있는 기업의 현직 사장급은 의장인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뿐이다. 담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협회 회장, 직원이 채 10명도 안 되는 자그마한 엔터테인먼트사 대표, 광고회사 대표가 이사회 자리를 채우고 있다. KT&G는 법적으로 광고를 할 수 없는 회사인데도 그렇다.

PMI 사외이사와 비교해보니…

KT&G는 KT, 포스코와 함께 2000년대 초반에 민영화된 ‘주인 없는 기업’ 3인방으로 꼽힌다. 하지만 나머지 두 회사에 비해 규모가 작고 연관 산업도 없는 탓에 KT&G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게 경영진과 사외이사 사이의 ‘부적절한 공생’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KT&G 이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꼽는다. 한국경제신문이 2001년 민영화 이후 KT&G에서 사외이사로 재직했거나 재직 중인 인사 44명의 직업을 조사한 결과 교수가 17명으로 가장 많았다. 기업인은 1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법조인 공무원 정치인 연구기관 출신이었다. PMI와 비교할 때 기업인 비중이 현저히 낮다. 그나마 KT&G처럼 이름 있는 기업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기업인은 2009년 이후 삼성중공업 부사장, 여의도 메리어트호텔 대표, 현 의장 등 세 명이 전부다. 김규식 전 기업지배구조포럼 대표는 “KT&G 사외이사 경력을 보면 다른 이유로 선임한 것 같다”며 “광고가 금지된 회사가 광고대행사 대표를 뽑은 게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리스크 못 걸러내는 사외이사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KT&G 사외이사들은 이사회에 문제가 있는 안건이 올라와도 걸러내지 못한다. 최근 논란이 된 1조5000억원 규모의 ‘미국 공탁금(에스크로) 몰취 위기’가 그런 예다. 업계 관계자는 “2021년 12월 KT&G 이사회에 미국 법인의 궐련 제품 잠정 판매 중단 안건이 올라왔다”며 “이때 에스크로로 걸어놓은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지적한 사외이사는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KT&G 관계자는 “법규 위반에 대한 통보나 제재를 받은 사실이 없는 만큼 공탁금은 2025년부터 순차적으로 돌려받을 것”이라며 “2021년 12월 이사회 기록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KT&G가 공채 출신으로 경영진을 꾸리는 ‘순혈주의’ 시스템을 구축한 것에도 문제를 제기한 사외이사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KT&G는 2001년부터 최근까지 KT&G 주식 1100만 주와 1000억원가량의 현금을 잘게 쪼개 KT&G 전현직 임직원들로 구성된 각종 재단·기금, 우리사주조합에 무상으로 넘겨 최대주주(보통주 기준 9.6%)로 올렸다. 이런 안건이 꾸준히 이사회에 올랐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KT&G는 무상증여를 주주총회 승인 없이 집행했다. 이런 방식으로 KT&G 전현직 임직원을 사실상 최대주주로 세우니 ‘사장=공채 출신’이란 공식이 굳어졌다.산업계에선 KT&G가 비전문가들을 사외이사로 앉힌 건 사실상 회사가 내민 안건에 찬성표만 던지는 ‘거수기’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업계 관계자는 “2015년 취임한 백복인 사장이 3연임하는 동안 KT&G 지배구조를 외풍에 덜 흔들리게 했지만 이 과정에서 사외이사를 거수기로 전락시켰다”며 “최근 불거진 ‘미국 공탁금 몰취 위기’는 사외이사의 핵심 기능인 ‘위기 알람’과 ‘경영 조언’을 내버린 대가”라고 말했다.

하헌형/박동휘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