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메소셜팜의 ‘기적’…장애인 일자리 모델 만든 SK하이닉스
입력
수정
SK하이닉스와 푸르메재단의 협업 사례가 발달장애인 청년의 사회적 자립을 돕기 위한 사회공헌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상훈 장춘순 부부가 기부한 1만5000㎡의 부지가 기업과 재단의 협력으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근로, 교육, 문화, 봉사의 무대로 재탄생하면서다[한경ESG] ESG NOW경기도 여주시 오학동에 있는 푸르메소셜팜은 푸르메재단이 운영하는 국내 최초 스마트팜 기반의 발달장애인 일터다. 보통의 일상을 꿈꾸는 발달장애인 청년 55명이 이곳에서 근무한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기술을 도입해 컴퓨터가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계측하고, 작물의 발육 상태에 따라 영양액을 공급하는 1800평 규모의 자동화 농장에서는 매년 65톤의 방울토마토가 출하된다.장애인의 사회적 자립을 도와주기 위해 설립한 푸르메소셜팜은 이상훈·장춘순 부부가 기부한 1만5000m2(약 4500평) 부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2020년 10월 착공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총건립기금 150억원이 필요했는데, 푸르메재단은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모금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 ‘구세주’로 등장한 곳이 SK하이닉스다.
건립비 지원하고 생산물 전량 구매
당시 농장 건립을 담당하던 재단 기획팀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주 인근에 공장을 둔 SK하이닉스에 스마트팜 계획을 제안했다. 때마침 이천, 여주 등 지역사회에서 사회 공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고민하던 SK하이닉스는 흔쾌히 협의에 나섰다.푸르메재단과 SK하이닉스 실무진은 머리를 맞대가며 한 팀으로 움직였다. 사업 내용을 세부적으로 구체화하면서 SK하이닉스 경영진도 힘을 보탰다. 2019년 8월 ‘푸르메-하이닉스 협약 체결’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협약을 통해 SK하이닉스는 총건립비 3분의 1에 해당하는 50억원을 기부했다. 동시에 농장에서 생산하는 작물을 전량 구매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면서 농장 건립이 현실화했고, 덕분에 다른 기업과 시민들의 기부도 이어졌다. 여주시, 한국지역난방공사, 장애인고용공단, 에너지기술연구원 등이 힘을 보탰다.
SK하이닉스의 이번 사회 공헌은 여러 각도에서 주목받고 있다. 기부금 총액만 중시하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다. SK하이닉스는 비영리 재단과의 협의를 통해 소외계층을 위한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만들어냈다.많은 기업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측면에서 사회 공헌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대부분 양적인 효과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한 대기업의 ESG팀 관계자는 “보통 대기업들은 사회복지공동기금에 자산 순위에 맞게 일정액을 기부하곤 한다”고 말했다.사회 공헌 패러다임 바꾼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도 기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지 등 양적 효과에 집중했다면 이번 협업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SK 측은 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푸르메재단 관계자는 “많은 기업이 장애인 일터를 만드는 사업에 대해 ‘운영이 잘못되면 어떡하냐’,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냐’, ‘기업이 책임을 져야 하면 어떡하냐’ 같은 두려움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장애인 고용률이 아무리 낮고, 부담금을 수십억씩 내면서도 대다수 기업은 과태료를 내는 게 낫다는 선택을 하곤 한다.
SK하이닉스는 푸르메재단과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사회 공헌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립비 기부뿐 아니라 판로 제공, 임직원 봉사 등 다각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스마트팜에서 생산되는 방울토마토 전량을 매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회사가 무조건 매입해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 사내 곳곳의 매점에서 직원들이 복지포인트로 구매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SK하이닉스 직원들이 푸르메소셜팜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높아지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SK하이닉스 매입량은 갈수록 늘고 있다. 복지포인트를 증액한 덕분이다. 이에 따라 온실도 기존 1200평에서 1800평으로 늘렸다. 푸르메 스마트팜은 지난해 기준 소셜팜 생산량 65톤 전량을 SK하이닉스에 납품했고, 이것으로 모자라 외부 협력 농장에서 매입한 방울토마토까지 소셜팜에서 가공 포장해 공급했다.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의 자원봉사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사원들이 매달 20~30여 명씩 자원봉사단을 조직해 농장을 찾고 있다. 농장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많은 자원봉사자 중 가장 열심히, 즐겁게, 일머리 있게 봉사를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작년에만 16회, 125명의 사원 및 가족들이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김동섭 사장 등 하이닉스 임원과 팀장급 리더 30명이 자원봉사를 실시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자회사 형태로 이천과 청주 등에서 대규모 장애인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NGO와 손잡고 다분히 모험적인 푸르메소셜팜 건립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꾸준히 지원하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장애인 직원들의 안전한 일터
푸르메소셜팜은 첨단기술이 적용된 스마트팜인 만큼 수익성이 높을 뿐 아니라 장애인 직원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푸르메재단은 스마트팜뿐 아니라 직원들의 여가와 교육을 책임질 교육 문화 시설도 함께 운영 중이다. 직원들은 오전과 오후 2개 조로 나눠 하루 4시간씩 일하면서 남은 시간에는 미술, 체육, 생활 등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푸르메소셜팜의 특징은 발달장애 직원을 보호 대상이 아닌, 보통의 노동자로 대우한다는 점이다. 채용 시 면접과 업무 능력 테스트를 거치고, 채용 후 직무 교육도 철저히 한다. 정직원으로 채용하면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정당한 임금과 4대 보험을 보장한다. 푸르메재단 관계자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주체가 되는 직장인 만큼 직원들의 자부심도 매우 높다”고 말했다. 이지선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2022년 4월에 발표한 ‘사회적 농업에서 종사하는 발달장애인의 일자리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보고서에 따르면, 푸르메소셜팜 장애인 직원들의 일자리 만족도 평균점수는 5점 만점에 4.11로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푸르메소셜팜은 장애인에게 자립의 기회를 줄 뿐 아니라 노년까지 발달장애 자녀를 돌보느라 어려움을 겪는 부모에게도 큰 희망을 주는 일자리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동휘 한국경제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