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지로의 빽빽한 건축물과 가수 김동률의 상관관계

[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그럼 그냥 제 어깨에 기대세요

“이젠 버틸 수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 기대어 (하략)”
- 작곡가 김동률이 1994년에 발표한 노래 '기억의 습작' 중

기억의 습작의 첫 소절을 들으면 왠지 ‘맞벽(건물과 건물을 띄우지 않고 붙여 짓는 건축방식)’과 ‘부벽(주로 성당 건축에서 활용했던 보조 벽)’처럼 서로가 의지해야만 바로 설 수 있는 건축 구조물이 떠오릅니다. 이 엄청난 음악이 잊지 못할 영화 '건축학개론(2012)'에 삽입될 수 있었던 건, 작곡가이기도 한 가수 김동률 스스로도 건축학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에선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어깨에 기댈 때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건축 전공자였던 이용주 감독이 건물을 쌓아 올리듯 감정을 축적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됩니다. 한국과 달리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는 맞벽 건축물이 많습니다. 말 그대로 건축물 간 거리를 최소화해서 벽을 맞대어 의지하는 구조입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힙지로(힙스터+을지로)’라고 정의하는 서울의 을지로(또는 종로)에나 가야 맞벽 건축을 볼 수 있습니다. (맞벽 건축이 있어서 힙지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서울 퇴계로의 맞벽건축
을지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1950~1960년대의 서울 곳곳엔 상대적으로 목조 건축이나 초가가 많았는데, 당시의 행정 권력은 격자형 도로망을 권장하는 동시에 건물을 빽빽하게 짓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초라함(결코 초라하다고 볼 수 없지만)을 감출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포촘킨 파사드'의 역할이었던 것이지요. 포촘킨 파사드는 18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의 절대군주 예카테리나 대제가 크림반도 시찰에 나서자 그 지역의 책임자였던 그레고리 포촘킨 제독이 허름한 마을 풍경을 가리기 위해 건물 입면을 가짜로 만들어낸 데서 유래했죠.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갖추고 내실은 부실한 도시 풍경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맞벽 건축이 오히려 이국적인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낸 동시에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매력적인 건축 사례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부벽’의 역사는 ‘맞벽’ 보다 더 깊습니다. 성당 건축에서는 육중한 자재의 무게를 버텨내기 위해 부벽(버팀벽)인 ‘버트레스(Buttress)’를 설치합니다. 건축가인 강한수 신부의 책 <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을 읽다 보면 유독 이 버트레스가 어떻게 성당 건축을 굳건히 버티게 해줬는지 잘 설명해줍니다. 이 부벽 덕분에 성당 건축은 무너지지 않고 오랫동안 지켜졌고, 더불어 우리는 근사한 회랑(回廊)까지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버텨내는 힘’이라고 하면 부벽 외에 옹벽도 있습니다. 부벽이 건축물 내부에서 함께 지탱해주는 것에 반해 옹벽은 대개 바깥에 자리를 잡습니다. 옹벽은 건축물 주변의 지반 붕괴를 막고 경사로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본격적인 산업화 이후의 도심 옹벽이 주는 느낌이 답답하다면 ‘화계(花階)’를 떠올려보면 어떠신가요? 우리 궁궐이나 사찰의 뒷마당에는 화강암을 반듯하게 자른 사괴석(四塊石)과 꽃, 나무를 함께 쌓아 담을 조성하는데, 이게 바로 화계입니다. 현대식 옹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구조물입니다.
창경궁의 화계
부벽과 화계처럼 보기에 튼튼해 보이는 구조물은 아니지만 ‘캔틸레버(cantilever, 외팔보)’야말로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을 만큼’ 신뢰를 주는 건축입니다. 현존하는 건축물 중에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낙수장(落水莊)이 가장 유명한데요. 마치 한옥의 긴 처마처럼 건축물이 한쪽 기둥이나 벽면에만 고정되어 다른 쪽은 공중에 떠있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캔틸레버입니다.

‘캔틸레버를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구나’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바로 서울 리움미술관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빛의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호주 시드니에 올린 ‘원센트럴파크(One central park)’입니다. 수직 정원을 표방하는 원센트럴파크의 캔틸레버 구조물에는 여러 개의 반사판이 달려 있는데 상대적으로 빛이 잘 들지 않는 건축물 하부의 구석까지 자연광을 보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캔틸레버라면 더욱 든든한 마음이 생길 것 같습니다.
시드니 원센트럴파크 캔틸레버 구조_장 누벨

○ 라면과 구공탄

만화가 김수정 화백 원작의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1988)'에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삽입곡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라면과 구공탄’이 일품입니다.

꼬불꼬불 꼬불꼬불 맛 좋은 라면, 라면이 있기에 세상 살 맛나
하루에 열 개라도 먹을 수 있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 좋은 라면
맛 좋은 라면은 어디다 끓여, 구공탄에 끓여야 제 맛이 나네 (중략)
만두의 친구가 찐빵이듯이, 라면의 친구는 구공탄이네여전히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이 노래를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음식에도 단짝을 이루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식품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은 언제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할 확률이 높습니다. 어린 아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에는 부모(또는 조부모)가,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을 테니까요.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가족, 친구, 반려동물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참 든든한 일입니다.

라면과 구공탄 외에도 문화예술 분야에는 참 단짝이 많습니다. 영화 감독과 작곡가가 유난히 합을 이루는 경우가 잦은데요. 크리스토퍼 놀란과 한스 짐머,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 웨스 앤더슨(또는 기예르모 델토로)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그렇습니다. 만약 한스 짐머가 없었다면 <다크 나이트(2008)> 속 배트맨의 비장미와 <인터스텔라(2014)>의 아련함, <인셉션(2010)>의 몽환적인 느낌이 줄어들었을 듯합니다. 히사이시 조가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는 더욱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키키 키린, 봉준호와 송강호처럼 서로를 페르소나(persona, 분신 같은 존재)로 여기는 영화 감독과 배우도 있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굳이 어깨에 기대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은 통하지 않았을까요? 키키 키린 배우가 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촬영한 마지막 작품 <어느가족(2018)>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줬고, 송강호 배우와 오랫동안 합을 맞춘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2019)>으로 서로에게 큰 영광을 안겼습니다. 어깨를 맞댄 단짝의 힘이 역시 특별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 모두에게 맞벽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지라도

한번쯤은 맞벽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아빠, 저 건물과 저 건물이 붙어 있네, 신기해. 한국에도 저런 건축이 있었다니”라는 둘째 아이의 호기심에서 출발해 맞벽과 부벽에 관한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지목했던 한 번은 맞벽 건축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같은 건물에 입주한 다양한 상호명의 간판이었는데, 유럽에나 있을 법한 모습이 어린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더욱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맞벽이나 부벽처럼 든든한 단짝이 되고 싶은 해질녘입니다.
포르투갈 포르투의 맞벽건축
뉴욕 맨해튼의 맞벽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