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성인들의 오랜 아지트…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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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구은서의 '책이 머무는 집'"시계가 없는 세상의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이렇게 하지. 내일 아침 해가 저기 저 언덕 위에 걸쳐지면 그때 만나자…" 안녕하신가영의 노래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을 듣다 보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연락하고 만났을까' 새삼 신기해집니다.스마트폰은커녕 2세대(2G) 휴대폰도 귀하던 1980~90년대, 젊은이들을 이어준 건 서점이었습니다. 서울 신촌 '오늘의 책', 안암동 '장백서원', 혜화동 '풀무질'…. 대학가 서점마다 게시판이 있었고 그곳에는 약속을 적어놓은 쪽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7시까지 독수리다방에서 기다릴게."암울한 시대는 젊은 지성인들을 서점, 그 중에서도 인문사회과학 서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시절 젊은이들에게 서점은 비판적 사고의 원천이었고, 연락망이자 세미나룸, 연인과 책을 주고 받는 낭만의 공간이었습니다.
서울 신림동 241-22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
1988년부터 36년째 서울대 앞을 지키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도 빼곡한 쪽지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쪽지들을 지나 서점 안으로 들어가면 수만권의 책, 그리고 그 책을 탐독하는 청년들이 가득했답니다. 때로는 시위에 가려는 대학생들의 가방이 한가득 쌓여 있기도 했다지요. 당시 학생증을 맡기고 병원비나 밥값을 빌려갔던 학생들이 몇십년 뒤에 서점에 찾아오기도 한다고 해요.
1993년부터 '그날이 오면'을 운영하고 있는 김동운 대표는 "그 시절 서점은 소통의 매개로, 서울대 학생들에게 우리 서점은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러야 하는 장소였다"며 "조국의 미래가 걱정되거든 '그날이 오면'을 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습니다.독재 정권 하에는 '불온서적'을 취급한다고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김 대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고 서점이 압수수색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유통하는 통로"라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버텼다고 하죠.
'금서'가 사라진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활자매체의 쇠퇴로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습니다.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던 '그날이 오면'도 골목길로 떠밀려 갔습니다. 김 대표는 "하루 최소 200~300명이 찾던 서점이었는데 이제는 방문객이 5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했어요.그런데 지난해 7월 '그날이 오면'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자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책 거래, 후원회의 도움, 인근 도서관과의 협업 등에 힘입어 1988년 처음 문을 열었던 바로 그 곳으로 돌아온 겁니다.원래 자리를 되찾은 '그날이 오면'을 최근 찾아갔습니다. 33.1㎡(10평) 남짓한 공간에 여전히 고집스럽게 인문사회과학 서적만 취급하고 있었어요. 창고에 있는 책까지 합치면 인문사회과학 서적만 약 2만 5000권에 달합니다.과거에 비하면 이곳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뜸해졌지만 여전히 독서모임, 저자와의 강연 등을 통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송곳 같은 책들"을 소개한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입니다. 관악구립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동네서점 바로대출제'로 뒤늦게 이 서점의 단골이 된 지역 주민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동네서점 바로대출제는 이용자가 원하는 책을 동네서점에서 빌려보고 반납하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매입해주는 제도입니다. 단, 관악구립도서관에 신청 도서가 4권 이상 소장돼있는 경우, 도서관 소장이 어려운 도서 등은 신청할 수 없습니다.
올 봄, 새 학기가 시작되면 '그날이 오면'에 눈 밝은 청년들이 새롭게 찾아오겠지요. '그날이 오면'을 처음 찾아온 스무살 새내기 대학생에게 무슨 책을 추천하겠느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주저 않고 <전태일 평전>이라 답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날이 오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고, 김 대표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이기도 하다고요.'그날이 오면'은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인근 대학들과 주기적으로 저자 강연, 세미나 등을 열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이런 연결고리가 끊기자 김 대표는 최근에는 인스타그램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얼마 전 낡은 책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아르바이트하던 학생이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던 중에 들른 고서점에서 1803년에 번역, 출간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집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귀한 마음이 담긴 선물을 '그날이 오면'의 상징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점의 상징',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의 상징' 같은 공간입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