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송 같은 '구리 파이프 나무'가 미술관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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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미술관 이길래 개인전산업현장에 놓인 구리 파이프,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 ‘금강송’.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 - 생명의 그물망'
문명의 상징인 구리로 강인한 나무의 생명력 표현
시간 지나며 변화하는 구리의 특성 살려
대형 설치작과 드로잉 전시 4월 21일까지
어떤 접점도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재료가 전시장에서 서로 만났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이길래 작가의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 - 생명의 그물망’에서다. 이길래는 구리 파이프를 조각내 그 절단면을 이어붙이는 작업을 고수해온 작가다. 금강송을 본뜬 소나무 작품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파이프를 얇게 썰어 나무 표피를 형상화했다. 기계 문명을 상징하는 물질인 구리 파이프로 나무라는 자연을 창조한 셈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소나무뿐만 아니라 그 뿌리와 줄기 등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 의미를 확장했다. 작가가 히말라야를 등산을 하며 느낀 감정이 모티브가 됐다. 이 작가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땅에 뿌리박고 있는 나무 뿌리의 강인함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생명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존재로 생각이 깊어진 계기”라고 말했다. 2층 메인 전시관에 놓인 뿌리 작품 '밀레니엄 - 파인 트리 루트'는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천장이 3층까지 뚫린 사비나미술관의 공간 특성을 활용해 두 층 높이로 줄기를 솟아올렸다. 미술관 바닥을 점령한 커다란 뿌리는 마치 관객을 잡아먹을 듯, 혹은 몸 위로 기어오를 것 같은 압도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땅에 숨어 보이지 않는 '뿌리'라는 존재를 밖으로 꺼내 그것이 숨기고 있는 '웅장함'을 표현했다. 작가는 전시장 환경에 맞춰 이 작품을 제작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작업해 1월에 작품을 설치한 후 개관 당일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구리 파이프로 만든 대형 조각을 천장에 매단 작품들도 전시됐다. 전시장 조명을 받아 벽에 비치는 그림자가 전시장의 텅 빈 벽을 채운다. 이 작가는 "그림자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지만 두 가지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게 의도했다"고 했다.
그의 구리 파이프 조각들을 가까이 보면 색깔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리라는 소재 특성상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부식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길래는 작품에 색을 입힐 때도 물감이나 색채를 칠하지 않는다. 대신 구리를 직접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해 색을 낸다. 소나무 잎을 표현할 때는 특정 화학약품을 사용해 부식시켜 초록색을 내고, 붉은 소나무인 적송을 만들 땐 그라인더로 표면을 긁어 빨간색을 만든다. 그는 “구리 파이프로 나만의 색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소재를 만난 건 행운이다”며 “작가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재료인데다 보존 기간도 길다는 게 더욱 매력적”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구리 파이프에 빠진 계기는 의외로 소소하다. 아내를 따라 내려간 충북 괴산에서 서울을 왕복하며 고속도로에서 파이프를 싣고 가는 화물차를 뒤따라가게 된 것. 그는 그 파이프 뭉치들을 보고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세포같다'는 영감을 받았다고. 이후 조각을 할 때마다 파이프를 사용했고, 소나무 조각이 유명해지며 '구리 파이프 작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그의 조각은 대형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가볍다. 내부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이런 특징 때문에 조각 안에는 사이사이 공기가 통한다. 인공적 재료 사이를 바람이 드나들게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전시장의 마지막인 4층 공간에는 그의 '뿌리 회화' 작품들이 전시됐다. 드로잉의 작업 과정도 특별하다. 쇠못에 먹을 찍어 한지에 한올한올 긁어내는 고된 작업이 기본이다. 이 작가는 "죽기 전에 회화 300점을 완성하는 게 목표다"고 했다. 그 만큼 오랜 시간을 쏟아야 하는 작업인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습이 바뀌어가는 그의 작품들. 작가는 "내 작품은 점점 익어간다"고 표현했다. 전시는 4월 21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