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고 때리고 돈 떼먹고"…'슈퍼 갑질'이 낳은 반전 결말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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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3대 거장(中)
괴팍한 '전투 교황'의 갑질
새우처럼 구부러진 허리
온갖 난관 뚫고 완성한 인류의 걸작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장화'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교황이 보낸 추적자들. 교황의 ‘슈퍼 갑질’을 견디다 못해 도망간 미켈란젤로를 다시 잡아 오라는 명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강제로 모셔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추적자들은 미켈란젤로를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쉽게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출발해 중간중간 말을 갈아타 가며 밤새 달린 것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잡아가 봐. 여기는 로마가 아니라 피렌체 공국 땅이야. 교황 땅이 아니라고. 당장 외교 문제가 될걸?”
추적자들은 울상이 돼 돌아갔지만, 미켈란젤로의 표정은 착잡했습니다. ‘아…. 이거 어떡하냐. 교황 말인데 안 들을 수도 없고….’ 대체 왜 미켈란젤로는 당시 서양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교황과 대판 싸우고 쫓기는 몸이 됐을까요. 미켈란젤로와 당시 교황, 그리고 ‘천지창조’로 잘 알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역작 시스티나 천장화(畵)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지난 기사인 <“죽도록 싫었다”…‘세계 최고 천재’가 혐오한 20대 男의 정체>(1월 20일자)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악덕 거래처’…‘전투 교황’ 갑질에 당했다
율리오 2세는 화끈했습니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그는 머리가 좋고 체력도 뛰어난 데다 야심도 커서, 교황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전쟁을 비롯해 큰 일들을 많이 벌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본거지인 바티칸의 모습을 뜯어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술과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대규모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고, 예술 작품들을 사들이며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하지만 한편 그는 충동적이고 절제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생활은 ‘막장’이었습니다. 성직자, 그것도 교황이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해서 성병에 걸렸고, 온갖 좋은 음식과 술을 밤낮으로 먹고 마셔서 통풍에 걸릴 정도였지요. 하지만 주변 사람을 가장 괴롭게 했던 건 불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욕하며 지팡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교황 성하 옆에 갈 때는 갑옷을 입고 가야 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도 만만찮게 성격이 더러운 인물. 교황과 천재 예술가, 두 괴팍한 거물들의 애증 섞인 관계는 인류 예술 역사에 남을 거대한 걸작을 만들게 됩니다.
“이건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길 일생일대의 기회다.” ‘초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된 미켈란젤로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당장 짐을 싸서 대리석 원산지(이탈리아 카라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리석을 골라 바티칸으로 보냈고, 조각을 구상하며 8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요즘 산 전체를 조각하는 꿈을 꾼다”고 적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칠 무대를 만난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기뻤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바티칸에 배달된 대리석을 본 교황은 더 기뻐했습니다. ‘걸작이 나오겠군.’ 교황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려고 자신의 궁전과 미켈란젤로의 공방을 직통으로 잇는 길까지 뚫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바티칸에서도 최고 권위의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이 1000년 넘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기 시작한 겁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무너지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게다가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은, 자신의 묘지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멋진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꽂혀버린 교황은 결국 모든 예산을 끌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에게 맡긴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되고, 관련한 비용 지급도 중지됐습니다. 문제는 당사자인 미켈란젤로가 별다른 연락을 못 받았다는 겁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미켈란젤로는 일단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교황청을 찾았지요. 하지만 이번엔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내일 오시랍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미켈란젤로는 교황청을 찾아가 문전박대당하기를 반복했습니다. 5일째, 마침내 폭발한 미켈란젤로는 문지기에게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습니다. “교황 성하께 이 한마디만 전해주게. 앞으로 내가 아무리 필요한 일이 있어도, 로마에서 날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제자를 시켜 공방의 물건을 전부 다 팔아버리도록 한 뒤, 밤새도록 말을 달려 피렌체로 도망쳤습니다. 곳곳에 심은 첩자들을 통해 이 일을 보고받은 교황은 즉시 추격자 다섯 명을 보내 미켈란젤로를 쫓아가라고 명했습니다. “당장 잡아 와!” 하지만 기사 첫 부분에 나와 있듯이, 미켈란젤로를 끌고 오는 임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최악의 중노동’ 떠맡다
‘이 녀석이 정말 단단히 삐졌구먼. 귀찮게 됐어. 그래도 곧 돌아오겠지.’ 교황은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일개 예술가가 교황의 말을 거역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벌써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돌아오면 맡길 다음 일을 생각해두고 있었습니다. 최근 금이 가서 떨어져 나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그림을 다시 칠하는 프로젝트였지요. 이곳은 교황의 주요 활동 장소이자 교황 선출 투표(콘클라베)가 열리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끌려오다시피 돌아온 미켈란젤로. 사실 따져보면 미켈란젤로의 행동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교황의 명령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공공연히 교황을 모욕했으니까요. 교황에게 간 미켈란젤로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교황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진작 왔어야지. 대체 뭘 믿고 지금까지 버틴 거냐? 내가 너를 찾아가서 빌기라도 할 것 같았냐!”
그 말을 들은 교황.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가 어째? 야 이 마귀 같은 놈아. 멍청한 건 너야!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여봐라. 이놈을 끌어내라!” 비록 성격은 최악이었지만, 예술적 소양이 깊고 마음속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존중했던 교황의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후 조금 민망해진 교황은 어찌어찌 미켈란젤로를 용서했습니다. 말을 꺼낸 불쌍한 주교는 난데없이 경비병들에게 붙들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야 했지만요.
어쨌거나 관계가 회복됐으니, 미켈란젤로에게 정식으로 일을 맡길 차례입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려 주게.”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거부했습니다. 자신을 조각가라고 생각했던 미켈란젤로에게 그림은 전공 분야가 아니었고, 성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별 볼 일 없는 미술가들이나 하는 일이었던 데다, 프레스코화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고난도의 중노동이었거든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프레스코화는 다른 그림과 달리 ‘시간 제한’이 있었습니다. 작업에 착수한 뒤 20시간 내로 정해진 부분의 그림을 마쳐야 했지요. 그 후에는 석고가 굳어버려서 그림을 더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레스코 화가 중에서는 그림을 빨리 그리기 위해 붓을 양손에 들고 그리는 기술을 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그림을 고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나무나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실수해도 그냥 그 위에 덧칠하면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성한 프레스코화에서 실수를 발견하면 해당 부분의 석고를 통째로 뜯어낸 후 새로 그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나마 벽화는 앞을 보며 평평한 면에 그리기라도 하지요. 천장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건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계속 위를 보며 작업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당시 유명한 프레스코화 전문가 대부분은 몸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끔찍한 허리 통증과 시력 저하는 고질병이었고요.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14세기의 한 화가는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가 30미터 아래로 추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황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교황이 하라면 해야지.
위장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고
‘질투하는 녀석들 뜻대로 되게 할 순 없지. 누구보다도 멋진 그림을 완성해 주마. 나보다 먼저 여기 프레스코를 그린 사람들이 내 그림 앞에 무릎을 꿇게 해주마.’ 미켈란젤로는 다짐했습니다. 뒤틀린 성격이 낳은 오해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투지를 불태우게 됐습니다. 1508년 5월, 작업은 높이 최대 40m에 달하는 발판 구조물을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자신도 몰랐습니다. 자기가 만든 발판에서 앞으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요.
미켈란젤로의 앞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중 최악은 육체적인 고통. 기형적인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계속 위로 눈을 치켜뜨고 그림을 그리느라 눈도 성치 못했습니다. 이 시기, 미켈란젤로는 너무 오랫동안 위를 올려다본 나머지 자신의 눈높이 아래에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증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읽고 쓸 때도 항상 천장화 작업을 하듯 종이를 높이 들어올려야 했습니다. 이 밖에도 미켈란젤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자꾸만 빨리 완성하라고, 그게 안 되면 그림을 중간에 보여주기라도 하라고 졸라대는 교황도 속을 썩였습니다. 완성 전 작품을 공개하는 걸 극도로 꺼렸던 미켈란젤로지만, 교황이 “안 보여주면 그림 그릴 때 뒤에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데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중간에 그림을 살짝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평생 투덜거렸지요. “끝까지 안 보여줬으면 훨씬 더 멋지게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천재는 천재였습니다.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미켈란젤로는 무서운 속도로 작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프레스코화 실력과 작업 속도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좋아졌지요. 미켈란젤로답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 속 인물을 경멸적으로 묘사하거나 손가락으로 욕하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다만 사진기나 망원경 같은 게 없는 시대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의 눈으로는 그런 요소들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들의 언어
그 모든 것을 품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천재 미켈란젤로에게 관람객들은 아낌없는 찬사와 경의를 보냈습니다. 후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중에는 렘브란트, 루벤스, 카미유 피사로 등 수많은 거장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일종의 교과서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 수석 궁정 화가이자 왕립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이었던 조슈아 레이놀즈는 학생들에게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신들의 언어와도 같으니 반드시 필사하라”고 권하기도 했지요. 괴테는 말했습니다. “한 인간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알고 싶으면, 시스티나 성당을 보라.”
그런 의미에서 천장화가 완성된 후 불과 4개월 만에 율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난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신이 탄생에 일조한,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걸작을 그 짧은 시간밖에 즐기지 못했으니 말이지요. 미켈란젤로를 여러모로 힘들게 한 괴팍한 사람이었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던 그가 없었다면 시스티나 천장화도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당당하게 그의 앞에 자격을 갖추고 선 도전자는 이제 오직 한 명. 라파엘로였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