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틀부터 탱탱볼까지… 익숙한 듯 색다른 작품들의 시선 강탈

아트사이드갤러리 플로렌스 유 키 리 개인전
'Let it sprout beneath my skin' 2월 24일까지
경복궁 바로 옆, 귀한 겨울 햇살이 쏟아지는 고즈넉한 갤러리. 통유리창이 매력적인 서울 종로구 아트사이드갤러리는 길거리에서 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지금, 이 갤러리 앞엔 거리를 지니는 이들의 발걸음이 자주 멈춘다. 익숙한 듯 색다른 작품들에 눈길을 빼앗겨서다.
1층 전시 전경.
눈길을 한몸에 받고 있는 작품은 ‘유아용 미끄럼틀’. 어린 아이들을 키워 본 가정이라면 한 번쯤 사 봤을 법한 가정용 플라스틱 놀이기구다. 하지만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난다. 아이가 내려와야 할 미끄럼틀의 내리막에 태블릿PC가 놓였다. 그리고 그 화면에서는 애니메이션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영상작품을 만든 작가는 플로렌스 유 키 리. 1994년생 홍콩 작가로, 이미 홍콩에서는 ‘미디어아트계의 떠오르는 샛별’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는 지난해 ‘애니메이션계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홍콩M+미술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플로렌스 유 키 리의 영상 작품.
그 이후 홍콩M+미술관이 바로 “작품 제작을 해달라”며 리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렇게 제작된 그의 영상은 지난해 12월까지 홍콩국제공항 미디어월에서 홍콩을 들어오고 나가는 수백만명의 관객을 만났다. 현재는 동일한 영상이 홍콩M+ 미디어 파사드에 흘러나오고 있다. 올해 12월까지 상영될 예정이다.

그런 리가 자신의 꿈과 기억이 담긴 작품들을 들고 한국 관객을 찾아왔다.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인전 'Let it sprout beneath my skin'을 열면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애니메이션 영상과 설치작품, 원화가 함께 전시됐다. 특히 리는 이번 서울 개인전을 위해 회화 전시에 첫 도전장을 내밀었다.
메인 영상작품 전시 전경.
그는 공원, 공사장 등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 장소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펼치는 작가다. 이번 전시의 컨셉은 ‘놀이터’다. 누군가에겐 즐거운 기억이 가득한 장소이지만, 작가에겐 어릴 적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리움과 외로움의 공간이 바로 놀이터다. 특히 오랜 영국 대학생활 이후 돌아왔을 당시, 어릴 적 기억의 장소라곤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홍콩에 대한 슬픔의 정서도 담겼다.

그래서인지 밝은 작품들이지만 주변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어딘가 서글프다. 이날 현장에 나온 리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장소를 작품으로 나타내고 싶었다”며 “나의 작업을 통해 관객들이 서로의 추억을 작품 안에서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시를 통해 놀이터에 담긴 자신의 추억을 표현하려 실제 본인이 갖고 놀던 장난감을 한국으로 들여왔다. 탱탱볼 하나마저도 모두 직접 홍콩에서 운송해 왔을 정도다. ‘나의 기억이 없는 물건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Plastic heart, 2024
지하에 놓인 ‘탱탱볼 자판기’에서 리의 전시는 시작된다. 레버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탱탱볼 하나가 튀어나오는 장난감이다. 1990년대 동네 문구점에서 자주 보던 기계가 설치작품이 됐다. 이곳에서도 그 시절 그대로 관객이 레버를 돌려 나오는 공을 가져갈 수 있다.

이 작품에도 작가의 기억과 지금 상황에 대한 대조가 담겼다. 리는 “어린 시절엔 저 공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다”는 그는 성인이 되어 보니 기계에서 저 공을 뽑는 행위가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떤 공이 나올지 돌리기 전까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바로 옆에서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은 이 전시의 ‘메인 작품’이다. 4분 길이의 영상은 리가 직접 장면을 드로잉한 후 프레임을 붙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1초당 프레임이 8개가 들어가는 정교한 영상작업이다. 별과 유리, 성과 같은 특정 이미지가 있었다 사라지는 것을 계속 반복하며 일시적인 삶과 ‘덧없는 인생’을 담았다. 영상도 음악도 반복적으로 흘러간다. 한 층 위에는 애니메이션의 기반이 된 드로잉 원화 작품들도 같이 걸렸다.
Albireo, 2023
반쯤 열린 미러볼 안에 태블릿PC가 담긴 작품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홍콩에서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전시를 의뢰받은 리 작가가 만든 희망의 작품이다. 영상이 흘러가는 화면 밑에는 어린이용 ‘병원놀이 장난감 세트‘가 놓였다. 작품을 통해 어렵고 마음이 다친 상황에서도 힘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투명 유리볼 안에 색색 탱탱볼이 쌓인 작품도 자세히 봐야 그 특별한 매력이 드러난다. 아주 작은 TV 화면들이 공 사이에 끼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화면의 정체는 다름아닌 ‘디지털 알람시계’. 홍콩M+미술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을 세 파트로 나눠 작은 시계 화면에 담아낸 재치 넘치는 작품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과 그것을 풀어낸 방식이 재치있는 전시다. 영상과 설치작품이 중심이 된 만큼 작품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은 아쉽지만, 갇힌 생각을 환기하고 치유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즐겨볼 만 하다. 전시는 2월 24일까지다.

최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