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석화플랜트 짓는 K건설...'텃세'도 '전쟁'도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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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대 석유화학단지 수주이달 초 찾은 폴란드 마조프셰주(州) 소도시 프워츠크 근교. 끝없는 평야 지대에 폴란드 최대 국영기업인 PKN올렌의 석유화학단지가 펼쳐져있다. 1970년대 공산권 시절 지어진 곳으로 녹슨 굴뚝에서 매연이 뿜어져나왔다.
EU 건설사 아성 무너뜨려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수익성 지켰다
PKN올렌과 쌓은 신뢰...추후 수주로 연계
사우디·인니에서도 최대 석화플랜트 따내
그 옆으로 현대엔지니어링과 스페인 건설사인 테크니카 레우니다스(TR)가 조인트벤처(JV) 방식으로 PKN올렌으로부터 수주한 ‘올레핀(에틸렌·프로필렌 계열) 확장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 곳에서 생산할 에틸렌은 연간 74만톤. 유럽 최대 규모 석유화학단지다. 유럽연합(EU)에서 고성장 국가로 꼽히는 폴란드의 자동차·전자·건설 등 전 산업을 뒷받침할 전망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텃세가 센 EU 회원국에서 사업비가 4조원에 가까운 대형 석유화학플랜트를 수주하며 건설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현장에서 실감한 공사는 전세계에서 인력과 장비가 모인 국제적 프로젝트였다. 점심시간쯤 찾은 현장에선 식사를 마친 4000여명의 인부들이 영하 10도의 살을 에이는 바람에도 진흙탕인 도로를 지나 공사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 인도, 필리핀, 방글라데시의 하청업체를 통해 현대엔지니어링과 함께 오랜 시간 일해온 사람들이다.JV 대표를 맡은 이승동 현대엔지니어링 플랜트사업수행실 상무를 중심으로 200여명의 현대엔지니어링 직원들이 이 곳에서 2년 간 머무르며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인도 출신의 한 현장 감독인부가 두 손 모아 인사하는 모습에 현대엔지니어링 관계자는 "우리와 10년 넘게 일한 베테랑"이라고 말했다.
작년 6월 땅 다지기만 완료됐던 현장은 반 년 만에 시설의 철골과 기계 설치가 마무리돼가는 단계다. 60m 높이의 5개 칼럼(굴뚝)과 100m의 굴뚝 하나가 곳곳에 섰다. 프로필렌 핵심 생산 설비인 101.8m 높이 C3스플리터의 설치가 최근 마무리됐다. 2021년 발주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자재비·운임비 상승 속에 7개월 간 일본에서 실어온 장치다.현장 관계자는 "6명의 용접공이 붙어 밤낮으로 48시간 만에 설치를 완료했다"고 말했다. 현장 전면으로는 납사를 가열해 에틸렌 등으로 분리하는 스팀 크래킹 퍼니스(고열화로) 5기가 설치 중이다. 미국 KBR에서 제작한 장비로 1기당 가격이 수백억원대다.
조만간 생산 설비를 잇기 위한 배관과 케이블 작업이 시작된다. 방글라데시 등에서 수천여명의 인부가 대기 중으로, 9000명까지 불어날 예정이다. 한 켠에는 이들이 상주하기 위한 15개 동 규모의 모듈러주택 단지가 마련됐다. 2026년말까지로 정해진 준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작업 속도를 바짝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선진국 건설사들과 기술력 정면대결서 승리
이 사업은 시작부터 현대엔지니어링에 불리했다. 폴란드는 EU 회원국으로 2027년까지 총 100조여원에 달하는 각종 기금을 지원받기로 예정돼 있어 EU 건설사의 '몫'이 정해져 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스페인의 TR과 함께 입찰한 이유다. 2004년 EU 가입 이후 폴란드가 받은 기금만 2378억유로(약 339조4571억원)에 달한다.더구나 사업 발주는 설계 기술력이 핵심인 기본설계(FEED)와 ‘상세설계-구매-시공-시운전(EPC)’ 연계 방식으로 이뤄졌다. FEED를 수행할 컨소시엄을 두 곳 선정하고, 이들 컨소시엄 중 한 곳만 EPC 사업을 수주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대형 석유화학플랜트의 FEED·EPC 연계 수주는 최근까지 설계 기술력을 오랜 기간 쌓아온 미국·EU 건설사들의 전유물로 꼽혀왔다.
하지만 현대엔지니어링·TR 컨소시엄은 2021년 4월 사이펨(이탈리아)·테크닙(프랑스)를 꺾고 EPC 사업을 따냈다. FEED 기술력에서 발주처의 인정을 받은 데다, 2020년 폴란드 2위 석유화학기업인 아조티 그룹으로부터 수주한 폴란드 슈체친의 PDH/PP 플랜트(1조2800억원)에서 보여준 사업 수행 능력을 높게 평가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프로젝트에서 현대엔지니어링은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도 2년 만에 준공한 데 이어 시운전까지 성공했다.이 사업은 현대엔지니어링의 사운을 엎을 뻔한 현장이었다. 수주 4개월 만인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로 국가동원령이 내려지자 폴란드에 머물던 우크라이나 노동자가 대거 귀국했다. 게다가 러시아 등으로부터 수입하던 자잿값이 급등했고, 운임도 폭등했다.
설상가상으로 공동 수주업체인 스페인 테크니카 레우니다스(TR)마저 공사 포기 의사를 전달해 와 적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불어날 위기에 처했다. 현장 관계자는 “인력 조달을 위해 현지 하청업체와 협의를 하면 비용을 두 배로 높여 부르더라”라며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공사 기간 연장과 공사비 증액을 끌어내기 위해 발주처(PKN올렌)와 1년6개월간 20여 차례 협상을 반복했다. PKN올렌에 사용된 공사비가 적정한지를 알리기 위해 컴퓨터에 저장된 모든 자료를 보여줬을 정도였다. 협상 끝에 공사 기간은 2년(2026년12월 준공 예정), 공사비는 2조7000억원에서 대폭 증액됐다. 이승동 상무는 “공사비 절감 역량과 공사 기간 단축 노력을 인정받았다”며 “설득 과정에서 PKN올렌과 신뢰를 쌓은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사우디·인니에서도 ‘최대 규모’ 석화단지 짓는다
현대엔지니어링은 동유럽의 ‘큰 손’으로 불리는 PKN올렌과의 협력 관계를 이번 사업의 큰 성과물로 꼽는다. PKN올렌은 작년 기준 매출이 90조747억원, 영업이익이 10조739억원에 달하는 국영기업으로 이번 사업비의 70%를 현금으로 마련하고 있다. 석유정제 시장에서 매출액 기준 시장점유율이 폴란드 65%, 체코 59%, 리투아니아 88%에 달할 정도로 독점에 가까운 기업이다. 추후 다른 지역에서도 발주가 예상되고 있다.대표적인 산유국인 사우디와 인도네시아에서도 '최대' 석유화학플랜트 프로젝트 수주에 잇따라 성공하고 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현대건설과 함께 작년 6월 수주에 성공한 ‘아미랄 프로젝트 패키지1·4’ 계약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사우디 최대 규모인 연간 165만톤의 에틸렌 생산설비를 짓는 사업으로 발주처인 아람코는 총 6조5545억원 규모의 사업비를 지출할 계획이다. 그동안 아람코와 맺어온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인도네시아에선 최대 석유화학단지 프로젝트를 두고 현대와 삼성의 격전이 현재 진행형이다. 인도네시아 최대 규모 석유화학단지가 될 ‘TPPI 올레핀 석유화학 프로젝트’다. 발주처인 인도네시아 국영석유기업 페르타미나가 총 사업비 4조6900억원을 들여 자바섬 투반 지역에 연간 에틸렌 생산량 100만톤 규모 플랜트를 조성한다. 여기에 현대엔지니어링과 삼성현대엔지니어링이 각각 FEED 용역사로 선정돼 마무리 단계다. 두 회사는 EPC 입찰서를 제출한 상태로 올해 상반기 두 개 사 중 한 곳만 EPC 사업을 수주하게 된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작년 연말에도 자카르타 인근 지역에 연간 에틸렌 생산량 100만톤 규모 석유화학단지인 ‘라인 프로젝트’ 계약을 따냈다. 말레이시아에선 삼성엔지니어링이 셸 ORP 프로젝트의 FEED 용역을 수주했다. 사라왁주 빈툴루지역에 사업비 8918억원을 들여 가스 처리 설비를 짓는 사업으로, FEED 용역을 마무리해 EPC 사업까지 수주할 계획이다.
바르샤바=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