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칼에 숨진 여고생' 5·18 열사 가족 정신적 손배 승소
입력
수정
1980년 5월, 가슴에 자상 입은 여고생 사망…남은 가족도 질곡의 삶으로 고통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가슴이 잘린 채 사망한 여고생의 가족이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29일 광주지법에 따르면 민사6단독 정지선 부장판사는 A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의 폭행으로 발생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정 부장판사는 A씨에게 2천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A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상시 사망한 여고생의 오빠다. 여동생 손옥례 양은 1980년 당시 취업을 준비하던 고등학생이었다.
5월 19일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고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손양은 그 뒤로 다시 귀가하지 못했다.
손양의 부모와 오빠 A씨는 돌아오지 않는 손양을 찾아 광주 곳곳을 누볐다. 계엄군에 희생당한 주검이 쌓여있던 전남도청 상무관과 대학병원을 뒤지고 나서 광주공원을 지나던 A씨는 계엄군에게 붙들려 무차별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5월 27일이 되어서야 여동생에 대한 비보를 접할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A씨는 광주지방검찰청에 사망자의 신원정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검찰청에서 사망자 명단 속 동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신원 정보에는 신원불명 사망자의 검시 사진이 첨부돼 있었는데, 여동생은 왼쪽 가슴이 자창과 함께 잘려 나가 있었다.
손양이 사망한 지 한 달 뒤에 작성된 광주지검 공안부의 검시조서는 "왼쪽 가슴에 날카로운 것으로 찌른 상처와 골반부 및 대퇴부에 여러 발의 총탄이 관통했다"고 기록됐다.
일각에선 계엄군이 성폭행을 은폐하려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A씨는 광주 망월묘지에 가매장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고 가슴에 묻으려 했지만, 이들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A씨의 다른 남동생은 5월 18일 교회에서 다녀오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22일 석방될 때까지 온몸이 멍이 들 정도로 모진 구타를 당했다.
남동생은 허벅지에 대검에 찔린 상처를 입었고, 후유증으로 간질 증세를 보이며 군인들만 보면 싸우려 들었다.
아버지는 딸 손양의 시신을 보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여기에 아들까지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자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5·18 발생 1년 만인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딸이 숨졌다는 소식에 사지가 경직되는 이상 증세가 찾아와 호전되지 못하고 반신불수의 몸으로 6년 동안 고생만 하다 세상을 등졌다.
일가족 중 3명이 5·18 관련으로 사망했기에, 아버지와 어머니, 손양은 5·18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부모의 치료비를 대느라 빚더미에 허덕여 파산 지경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도 이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신경증성 우울증 등에 시달려 현재까지도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정신장애인으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계엄군이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소문은 신군부에 의해 유언비어로 매도됐지만, 5·18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은 손양의 사연을 "두부처럼 잘려 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가사의 노래로 만들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며 해마다 5월이 되면 다시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정 부장판사는 A씨에게 2천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A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상시 사망한 여고생의 오빠다. 여동생 손옥례 양은 1980년 당시 취업을 준비하던 고등학생이었다.
5월 19일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고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손양은 그 뒤로 다시 귀가하지 못했다.
손양의 부모와 오빠 A씨는 돌아오지 않는 손양을 찾아 광주 곳곳을 누볐다. 계엄군에 희생당한 주검이 쌓여있던 전남도청 상무관과 대학병원을 뒤지고 나서 광주공원을 지나던 A씨는 계엄군에게 붙들려 무차별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5월 27일이 되어서야 여동생에 대한 비보를 접할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A씨는 광주지방검찰청에 사망자의 신원정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검찰청에서 사망자 명단 속 동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신원 정보에는 신원불명 사망자의 검시 사진이 첨부돼 있었는데, 여동생은 왼쪽 가슴이 자창과 함께 잘려 나가 있었다.
손양이 사망한 지 한 달 뒤에 작성된 광주지검 공안부의 검시조서는 "왼쪽 가슴에 날카로운 것으로 찌른 상처와 골반부 및 대퇴부에 여러 발의 총탄이 관통했다"고 기록됐다.
일각에선 계엄군이 성폭행을 은폐하려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A씨는 광주 망월묘지에 가매장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고 가슴에 묻으려 했지만, 이들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A씨의 다른 남동생은 5월 18일 교회에서 다녀오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22일 석방될 때까지 온몸이 멍이 들 정도로 모진 구타를 당했다.
남동생은 허벅지에 대검에 찔린 상처를 입었고, 후유증으로 간질 증세를 보이며 군인들만 보면 싸우려 들었다.
아버지는 딸 손양의 시신을 보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여기에 아들까지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자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5·18 발생 1년 만인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딸이 숨졌다는 소식에 사지가 경직되는 이상 증세가 찾아와 호전되지 못하고 반신불수의 몸으로 6년 동안 고생만 하다 세상을 등졌다.
일가족 중 3명이 5·18 관련으로 사망했기에, 아버지와 어머니, 손양은 5·18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부모의 치료비를 대느라 빚더미에 허덕여 파산 지경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도 이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신경증성 우울증 등에 시달려 현재까지도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정신장애인으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계엄군이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소문은 신군부에 의해 유언비어로 매도됐지만, 5·18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은 손양의 사연을 "두부처럼 잘려 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가사의 노래로 만들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며 해마다 5월이 되면 다시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