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인 얼굴에 그렇지 못한 눈동자…강남 한복판에 걸린 대형 초상화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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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강형구 특별전 '시대의 초상'높이 5.35m, 폭 4m의 대형 인물화가 관객을 노려보고 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마구 뻗친 수염, 앙다문 입술에서 인물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대번에 느껴진다. 낮은 명도의 붉은 배경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인물의 안광이 묘한 이질감을 낳는다. 초상화가 강형구(68)의 '자화상'(2019)이다.
건설공제조합 건설회관에서 4월 8일까지
크리스티 홍콩서 수억원대 거래되지만
한때 '판매를 포기한 작가'로 불리기도
면봉, 스프레이, 지우개로 그려낸 대형 초상화
"잘나가는 작가 되기 보다
작업실서 잘 안 나가는 작가 되고 싶어"
낯설게 느껴지는 건 자화상의 눈빛만이 아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도 독특하다. 서울 논현동 한복판의 건설회관에 들어서면 강형구의 대형 자화상을 비롯해 처칠, 간디, 마릴린 먼로 등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인물들의 초상화 20여점을 만나볼 수 있다. 건설공제조합이 지난해 말까지 사무실로 사용한 곳을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선보이는 첫 전시다.수록된 작품들의 공통점은 하나. 잔털 한 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에 유난히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강형구의 인물화는 이렇듯 리얼리즘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는 강 작가의 작품세계를 두고 "현실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창조적 상상력이 결합한 '허구적 현실주의'"라고 평가했다.
강형구는 세계 양대 미술품 경매회사 중 하나인 크리스티가 사랑한 남자다. 2007년 크리스티 홍콩에 출품한 고흐 초상화는 456만7500만 홍콩달러(약 7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추정가 50~60만 홍콩달러(약 8500만~1억원)를 훌쩍 넘은 수치다.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베토벤 등 이후 출품한 인물화들도 전량 낙찰됐다. 그의 작품은 미국의 지미 카터 센터, 영국의 프랭크코헨 컬렉션,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등 국내외 유명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카메라 셔터 몇번이면 인물을 정밀하게 옮길 수 있는 시대인데도, 극사실주의 초상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1980년대 중앙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돌연 미술계를 떠났다. 직접 화랑을 운영하다 망하기도 했다. 20여 년 만에 예술의전당 개인전으로 복귀한 그는 수십점의 자화상을 선보였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한테, 대형 자화상은 자신을 돌아보는 수단이 됐던 셈이다.이른바 '팔포 작가(작품 판매를 포기한 작가)'라고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작품이 처음 팔린 것도 52세 때 일이다. 200호 이상의 대형 캔버스에 스프레이와 면봉, 지우개로 수천번 찍어 그린 작품들이 '가성비'가 나올 리 만무했다. 작가는 "잘 나가는 작가가 아니라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금도 한해 30여점의 작품을 묵묵히 그려내고 있다.이번 전시에는 노동과도 같은 그의 작업 현장을 보여주는 공간도 마련됐다. 전시장 1층 아틀리에에선 작가가 작업하는 모습을 '직관'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정나연 레이빌리지 대표는 "화가가 작업 공간을 보여준다는 건 요리사가 주방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단 한 명의 조수도 대동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홀로 작업하는 작가의 신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전시 제목 '시대의 초상'은 건설회관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미술품 전시가 열리게 된 배경을 암시한다. 미술 작품이 갤러리나 미술관을 넘어, 시민들의 일상과 더 가까워진 시대상을 반영했다는 의미다. 강형구 작가는 "건설회관 등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이 계속 확대되며 일반 감상자들도 쉽고 친밀하게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길 바란다"고 했다. 전시는 4월 8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