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전기차시장 포기 못해"…'中 액셀' 밟는 현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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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현대, 新전기차 개발 프로젝트 개시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중국 지리자동차의 전기차 브랜드 ‘지커’에 몸을 실은 건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열린 작년 10월이었다. 당시 주최 측이 대회장을 오가는 차량을 공식 스폰서 차량인 지커로 제한한 탓에 국가대표 양궁팀을 격려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야 했던 정 회장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아시안게임때 中 '지커' 탄 정의선
디자인·주행성능에 깜짝 놀라
"성공 요인 배우자" 메시지 건네
아이오닉 등 기존 모델 대신
中 맞춤형 전기차' 출시 계획
그렇게 만난 ‘중국 전기차’의 디자인과 주행 성능을 정 회장이 인상 깊게 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업계 관계자는 “당시 정 회장이 주변 직원들에게 ‘중국 전기차의 발전 속도가 놀랍다. 중국 전기차의 성공 요인을 배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달라진 중국 전략
현대차의 중국 전략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중국에선 돈 벌기 어렵다”며 위축돼 있던 데서 벗어나 “전기차 세계 1위 시장에서 부딪쳐 보자”며 정면 승부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베이징현대가 들고나온 게 새로운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인 ‘OE RE’다. 아이오닉 시리즈 등 현대차가 보유 중인 전기차 모델을 그대로 중국에 들여오는 게 아니라 중국 현지 수요에 맞춘 전기차를 만들겠다는 것이다.중국인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과 기능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장착해 가격을 낮춘 전기차로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베이징현대차 관계자는 “‘중국 맞춤형 전기차’를 만든다는 큰 그림은 그렸지만 세부사항은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비보다 공격 택한 현대차
지난해 베이징현대는 베이징차의 전기차 모델인 ‘아크폭스’를 베이징 3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베이징현대 생산라인의 절반을 놀리고 있는 만큼 이 공장에서 아크폭스를 제작하면 공장 가동률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전기차 생산 노하우도 쌓게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하지만 생산 조건 등을 둘러싼 베이징차와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협상은 결렬됐다. 이것도 현대차가 중국용 신규 전기차 개발에 나서는 요인이 됐다.세계 최대 전기차시장이 된 중국을 포기할 수 없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비야디(BYD)가 지난해 4분기 테슬라를 제치고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 1위에 오르는 등 중국산(産) 전기차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난해 중국이 수출한 자동차 491만 대 가운데 120만 대는 신에너지차(전기차·하이브리드카·수소차)였다. 신에너지차 수출 물량은 1년 전보다 77.6% 증가했다.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로선 어차피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과 맞붙어야 하는 만큼 중국 본토라고 전쟁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라며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세계 1위 中 배우자”
현대차가 오랫동안 ‘한 수 아래’로 보던 중국 업체들을 배우기로 한 배경에는 자동차에 대한 소비자 인식 및 선호도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가속 능력, 코너링 등 주행 성능과 정숙성이 ‘좋은 차’를 가르는 핵심 요인이었지만 전기차 등장과 함께 ‘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내연기관의 성능이 차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을 때는 중국차가 현대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며 “‘전기차 시대’란 새로운 세상이 열리자 사람과 돈을 집중 투입한 중국이 주도권을 잡게 됐다”고 말했다.중국차가 세계를 휩쓴 배경에는 가격 경쟁력이 한몫했다. 저가형 배터리로 평가절하되던 LFP 배터리는 BYD의 기술 혁신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중국 전기차 성장의 일등 공신이 됐다. 배터리 셀을 배터리 팩에 직접 장착하는 셀투팩(CTP) 방식을 통해 LFP 배터리의 성능을 크게 개선하면서다.베이징=이지훈 특파원/김재후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