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 지출 100兆 넘는데…5년 계획에 '비급여 개혁' 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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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급여 두고 복지부 '재탕' 대책올해 국민건강보험 총지출액이 1977년 제도 도입 후 47년 만에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한다. 전문가들은 건보 재정 건전화를 유지하면서 중증·응급 등 필수의료를 되살리기 위해선 기형적으로 커진 비급여 의료 시장을 정상화할 강력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향후 5년간 의료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제2차 건강보험 종합운영계획’을 다음달 초 발표하면서 이런 대책을 담지 않을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가 건보 개혁을 주저하는 사이 국민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붕괴는 한층 심화할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과잉진료·도덕적 해이에 눈 감아
필수의료 붕괴·재정 누수 불러
韓 비급여 시스템은 '만성질환'
호주, 비급여 가격 정부가 결정
日 혼합진료 금지 강력 통제
비급여 의료, 12년 만에 3배 폭증
29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다음달 발표하는 건강보험 종합운영계획에 건보가 적용되는 급여 진료와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를 섞어서 진료하는 이른바 ‘혼합진료’ 금지, 비급여 진료 가격 통제 같은 선진국 수준의 강력한 비급여 관리 제도를 도입하는 안을 검토했다가 결국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복지부 고위 관계자는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 등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최종적으로 제외하기로 했다”고 말했다.복지부는 대신 도수치료, 백내장 수술 등 주요 비급여 지출 항목에 대한 핀셋 관리, 모니터링 강화, 실손보험 재설계 등 지출 효율화에 초점을 맞춘 방안만 담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복지부가 그간 수차례 내놓은 비급여 관리 대책과 대동소이한 대책”이라고 평가했다.
정부의 중장기 의료정책 방향을 담은 건보 종합계획은 5년마다 새로 발표된다. 이번엔 지속가능한 건보 재정과 필수의료 문제 해결 방안으로 강력한 비급여 관리 제도가 핵심 내용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이 많았다.하지만 이번에도 정부가 개혁에 소극적인 데 대해 비급여가 가입자만 4000만 명에 달하는 실손보험과 결합하면서 사실상 복지 정책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비급여는 일반적으로 임상적 유효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거나 비용 대비 효과성이 낮아 건보가 적용되지 않는 의료 서비스다.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지 않아 가격이 비싸고 비용도 환자가 모두 부담해야 해 1990년대까지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다 1999년 실손보험이 등장하면서 판이 바뀌었다. 보험 가입으로 의료비가 ‘공짜’가 되자 과잉 진료 문제가 불거졌다.
과거 정부마다 내놓은 비급여 억제 대책은 모니터링 강화 등 미봉책에 그쳤다. 실손보험 자기부담률을 몇 차례에 걸쳐 최대 30%까지 높이는 대책도 나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환자는 혜택이 줄긴 했어도 비용의 70~80%를 보전받을 수 있고, 의사는 비싼 비급여 진료로 수익을 낼 수 있어서다. 2009년 6조1000억원이던 비급여 시장 규모는 2021년 17조3000억원으로 12년 만에 3배 가까이로 늘었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정부는 실손보험이 비급여 팽창의 원인이란 것을 알면서도 이해관계자들의 반발 등을 우려해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하지 않았다”며 “정부가 도덕적 해이를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 수준 비급여 제도 개혁 필요”
전문가들은 현행 비급여 제도가 필수의료 붕괴를 촉진한다고 입을 모은다. 의사들이 비급여로 돈을 벌기 쉬운 ‘피안성정’(피부·안과·성형·정형외과) 등 인기 전공과목에 몰리고 필수의료 중심인 종합·대학병원 대신 개원을 선호하고 있어서다.급여 진료와 비급여를 함께 제공하는 혼합진료가 일반화되면서 건보 지출액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올해 건보 지출액은 100조2000억원으로 한 해 복지부 전체 예산(122조원)과 맞먹는다.
선진국들은 비급여 전반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일본은 원칙적으로 혼합진료를 금지하고 있다. 독일에선 비급여 진료가 필요할 경우 환자가 의사의 증빙 서류를 첨부해 공공보험에 사전 승인 신청을 해야 한다. 호주에선 비급여 가격을 정부가 결정한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 교수는 “한국처럼 비급여 가격과 양을 의료기관이 자율적으로 정하는 나라는 없다”며 “정부가 가격 가이드라인을 정해주고 혼합진료는 무조건 보고하도록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정환/허세민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