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조바심이 졸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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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중학교 진학해서는 집에서 30리 떨어진 읍내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잠꾸러기에게 새벽 기차 타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챙겨주는 책가방을 들고 기차 기적이 들려야 뛰어가 간신히 타는 일이 빈번했다. 때로는 먼저 타고 온 여학생들이 나서서 뛰어오는 나를 가리키며 열차 출발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여중 3학년 누나 둘이 유독 챙겨줬다. 모자를 바로 씌워주기도 하고 교복 단추도 끼워줬다. 열린 가방을 알뜰하게 닫아주기도 했다. 속으로 키 큰 누나, 예쁜 누나로 불렀다. 자장면을 사주기도 했고, 숙제도 가르쳐줬다. 기차가 기다려졌다. 집에도 놀러 와 자고 가기도 하고 나도 두 누나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두 누나가 읍내에서 자취하기로 해 기차에서는 만나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키 큰 누나가 같이 자취해도 된다고 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아버지는 “생각 좀 해보자”라고만 했다. 저녁을 거르고 버티자 아버지가 불러 “조바심내지 마라. 조바심낼 일이 아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조바심을 “조마조마해 졸이는 마음이다”라며 길게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바심’은 타작을 뜻하는 말이다. 곡식 이삭을 비비거나 훑어서 낟알을 털어내는 탈곡(脫穀)을 뜻한다. 조 이삭을 털어내는 일이 조바심이다. 조는 이삭이 질겨서 잘 떨어지지 않아 비비고 문지르면서 애써야 간신히 좁쌀을 얻을 수 있다. 조바심할 때는 당연히 힘만 들고 좀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진다는 데서 이 말은 유래했다. 아버지는 “조바심은 시간이 걸려야 한다”고 설명했고 나는 아버지가 시간을 벌려고 한다고 생각했다.해뜨기 전 아버지가 불러 허락했다. 어머니는 “네 빨래는 집으로 가지고 오라”는 조건을 달았다. 두 누나는 어머니보다 더 참견이 심했다. 3학년 올라가서 일이 터졌다. 제보가 있었다며 학생지도 주임인 담임선생님이 불러 물었다. “내 방은 언제나 열려있고 상담내용은 비밀을 보장한다”라던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듣고 중대 사고로 규정해 긴급회의를 요구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 엑스(X) 누나인 여고생 둘과 동거한다”라고 공표해 문제를 키웠다. 누나들이 다니는 여고에서는 학생들이 원해 자율에 맡겼다고 했으나, 담임선생님은 징계를 주장했다. 끝내 아버지가 나서 가깝게 지내던 교장과 교감 선생님에게 “책임지고 자취를 끝낸다”고 약속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누나가 없는 남자들은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래서 위로 누이를 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형제자매 대부분이 그렇듯 부러워할 것은 아니다”고 전제하며 “맏이인 네가 부모의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받았어도 동생들에게 이권이나 사랑을 뺏겼다는 질투심 때문에 벌인 일 같다는 의견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라고 했다. 훗날 “이제껏 키우며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시간 지나면 자연히 사그라질 일이다. 막으면 누나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남자 본능이 작동해 덧날 수 있다”는 주위의 조언이 있는 데다 “사춘기인 네가 조바심내는 게 보기 안쓰러워 졸속하게 결정한 거지만, 후회된다”고 했다.
그날 설명한 고사성어가 ‘교지졸속[巧遲拙速]’이다. ‘교지는 졸속만 못하다’라는 뜻이다. 뛰어나지만 늦는 사람보다, 미흡해도 빠른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이다. 손자(孫子) 작전편(作戰篇)에 나온다. 사전은 ‘교지’는 전쟁에서 교묘한 전략만 따지다가 때를 놓치는 것을 말하고, ‘졸속’은 전략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속전속결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원문은 이렇다. “병법에서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속전속결 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교묘한 전략으로 지구전을 펴는 것은 본 적이 없다[故兵聞拙速 未覩巧之久也].” 전쟁 준비에 다소 모자란 점이 있더라도 속전속결로 결판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지구전을 치를 때의 폐단을 명확히 알기 때문이다. 장기전은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 피해도 만만치 않으므로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아버지는 “너에게서 비롯했지만, 내 일생에 가장 후회되는 결정이었다”라며 “준비하지 않으면 조바심 나고 조바심이 졸속을 부른다. 모든 일은 이루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조바심낼 일이 아니다”고 강조하며 “여유와 신중성(愼重性)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신중성은 자신의 미래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행동해 불필요한 위험이나 후회를 미리 예방하는 태도와 능력이다. 버릇이 들지 않으면 쉽게 얻어지는 인성이 아니다. 서둘러 손주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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