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팟을 탄생시킨 '숨은 조력자' ... 그가 절대 굽히지 않았던 철학들 [서평]

위즈덤하우스
디터 람스
애플이 2001년 10월 내놓은 '아이팟 1세대'
“이 디자인은 온전히 나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회색 본체, 작은 화면, 버튼은 단 다섯 개. ‘미니멀리즘’의 끝판왕으로 불리며 2024년인 현재까지도 ‘전자제품 수집광들’을 불러모으는 이 제품은 애플이 23년 전 내놓은 첫 음악 플레이어 ‘아이팟 1세대’다. 이 디자인은 이후 애플 ‘아이팟 디자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최소한의 디자인’으로 세계를 홀린 아이팟을 처음 고안했다고 알려진 디자이너는 애플 수석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 그는 당시 ‘아이팟의 혁신적 디자인의 비결’에 대해 묻자 “내 것이 아니다”라는 대답을 내놔 화제를 모았다. 자신의 롤모델이 만든 라디오를 참고해 완성한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디터 람스.
아이브가 지목한 그 ‘롤모델’은 전자제품 제조업체 브라운의 전 수석 디자이너 디터 람스. 그는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찬사를 받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하나다. 그가 디자인한 휴대형 라디오 ‘T3’는 애플 mp3의 토대가 되었고 소형 계산기 ‘ET33’은 지금 아이폰에 탑재된 ‘계산기 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람스는 자신만의 확고한 디자인 철학을 가진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가 30년 전 말한 철학들은 오늘날 여전히 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 미친 람스의 영향에 존경을 표하며 첫 아이폰을 헌정하기도 했다.
‘디자이너들의 아버지’ 디터 람스가 자신의 디자인 이야기와 철학을 한 권에 담아낸 책 <최소한 그러나 더 나은>이 국내 출간됐다. 책은 람스가 1961년부터 1995년까지 브라운의 디자인 부서를 이끌며 굽히지 않았던 10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그는 책을 시작하며 ’좋은 디자인’에 필요한 딱 세 가지 조건을 말한다. '사용하기 쉽고, 유용해야 하며, 오래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람스의 인생은 ‘오직 디자인’뿐이었다. 5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을 만큼 욕심도, 특별한 취미도 없는 그에게 디자인은 일이자 곧 취미, 삶의 전부였다. 그는 브라운에서 나온 뒤 안주하는 대신 가구 디자인업체 비초에에서 가구 디자인에 뛰어들었을 만큼 분야를 가리지 않고 도전하며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 독일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전쟁 속 얻은 교훈을 디자인 철학에 그대로 옮겼다. “디자인이란 단순히 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것. 그는 이 철학 때문에 환경 파괴와 스피드만을 추구한다고 여겼던 자동차 디자인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T3(1958)
디터 람스가 브라운에서 가장 첫 번째로 강조한 원칙은 ‘Less, but better’. 최소한이지만, 더 나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제품을 예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품질, 수명, 기능을 높이는 일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브라운에서 이 원칙을 내세우며 세상에 출시한 면도기, 라디오를 비롯한 수백 개의 제품은 지금까지도 고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책 속에서는 각 제품의 디자인을 고안할 때마다 람스가 고려했던 원칙과 규칙들을 하나씩 소개한다.

스마트폰과 같은 가전제품을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마다 새 것으로 갈아치우는 오늘날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계속 새로운 디자인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에게 람스의 조언은 큰 울림을 준다.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디자인은 오랜 세월동안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 없는 소비를 위한 생각 없는 디자인의 시대는 끝났다”이같은 디터 람스의 철학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더욱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작은 제품 뒤 람스의 큰 철학이 담긴 책은 그가 고수해 온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디터 람스의 '좋은 디자인을 위한 10가지 철학'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의 이해를 돕는다
좋은 디자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좋은 디자인은 오래 간다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완벽하다
좋은 디자인은 환경을 생각한다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