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목, 폐자재, 고철…'쓸모 없는 것들의 쓸모'로 건네는 위로

[전시 리뷰] 정현 개인전 '덩어리'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3월 17일까지

쓰임 다한 사물들이 조각으로 재탄생
서울역 침목 활용한 '서 있는 사람'
5~6년 녹슬길 기다려 만든 '녹 드로잉' 등

여수서 산책하며 모은 각양각색 돌멩이
"양극단 갈라진 사회의 화합 노래하고파"
정현 '무제'(2005), 석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제공
침목, 폐자재, 고철….

쓰임을 다한 사물들이 따스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의 얼굴이 되고, 각자의 개성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이 된다. 지난 30여년 간 생활폐기물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여온 조각가 정현(67·사진)한테 쓸모없는 것이란 없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은 것들에도 사연이 있다. 남모르게 살아가며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이들의 강인함을 노래하고 싶다."작가가 최근 머문 곳은 전남 여수의 한 레지던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며 3개월간 마음을 비워내기 위한 산책에 나선 장소다. 발길에 차이는 숱한 돌멩이도 쉽게 넘기지 않았다. 거센 파도를 맞아 매끄러운 놈, 아직 날카로움을 간직한 놈 등 각양각색이었다.
정현 개인전 '덩어리' 전시장 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제공
이들의 덩어리진 시간은 작가의 손을 거쳐 스티로폼 조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 남현동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덩어리'에서다. 1990년대 이후로 제작한 침목, 아스팔트 기반의 조각부터 녹슨 철판을 활용한 드로잉, 3D프린팅 기술을 접목한 근작까지 30여점을 담은 회고전이다.

작가는 30세의 늦은 나이에 프랑스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에서 갈고 닦은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을 선보였지만,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동료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철학적 사유가 결여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다. 작가는 일반적인 도구인 조각도나 헤라 대신 삽이나 톱, 도끼를 들기 시작했다. 정교한 손기술이 아닌 즉각적인 감정을 조각에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정현 작가 프로필사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제공
버려진 사물에 대한 관심도 이때 싹텄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서울역 한편에 쌓여 있던 침목이었다. 폐기처분을 앞두고 있던 이들을 개당 2만원에 사들였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으며 수백t에 달하는 기차를 지탱한 만큼, 단단하고 질 좋은 녀석들이었다. 하수도 공사 현장을 기웃거리며 폐아스팔트를 구하고, 의료기 회사에서 폐기한 엑스레이용 필름을 수집하기도 했다.

대표작 '서 있는 사람'은 침목을 거칠게 잘라 만든 작품이다. 미완성품처럼 거칠고 투박하지만,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이 돋보인다. 각박한 하루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을 형상화한 작품 50점은 프랑스 팔레루아얄 정원에 2016년 전시되기도 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이 역설적으로 프랑스 임금이 머물던 공간에 우뚝 선 것이다.
정현 '무제'(2015), 철판에 녹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그의 작품들은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한다. '녹 드로잉'은 흰 철판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낸 뒤 비 오는 날에 노출해 녹이 흘러내리도록 의도한 작품이다. 철판이 산화되며 작품이 되기까지 길게는 5~6년씩 걸리기도 한다. 작가는 "나는 흠집만 냈을 뿐, 자연과 시간이 그려준 것"이라고 말한다.인간을 주로 표현해온 그의 작품 세계는 최근 자연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이번에 새로 선보인 스티로폼 연작은 여러 형태의 돌들이 서로 결합한 형태다. 여수의 한 섬에서 수집한 돌들에 번호를 붙이고, 이들을 본떠 3D프린팅 기술로 접합한 결과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등 서로 다른 모양새를 가진 돌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작가는 "사회가 양극단으로 갈라진 지금, 원시 상태의 자연에서 화합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3월 17일까지.
정현 개인전 '덩어리' 전시장 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제공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