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VC 업계 '잠긴 돈'만 413조원…스타트업 '줄파산' 우려
입력
수정
드라이파우더 규모 역대 최대 3110억달러미국 벤처캐피털(VC) 업계에 413조원 넘는 현금이 묵혀 있는 상태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고금리에 창업 생태계 사정이 악화하자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역대급으로 축적됐던 투자금의 발이 묶이게 됐다는 분석이다.
자금조달 환경 악화…스타트업 투자 망설여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미국 VC 업계에서 아직 집행되지 않은 미소진 투자 자금(드라이파우더) 규모는 현재 3110억달러(약 413조6000억원)에 달한다. 팬데믹 기간 시중에 유동성이 넘쳐난 덕에 4350억달러(약 578조4000억원)어치 역대급 규모의 투자 자금이 조달됐는데, 이 중 실제 집행된 건 절반뿐이었다.VC 투자자들이 신생 기업에 대한 ‘과감한 베팅’을 망설이면서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잇따른 금리 인상으로 스타트업들의 자금 조달 사정은 매우 빠듯해졌다. 그 결과 VC 시장에서의 가치 평가도 한층 낮아진 상태다. 스타트업들의 파산 건수는 1년 새 두 배로 증가했다. 화상회의 솔루션 개발업체 호핀(Hopin), 트럭운송업체 콘보이(Convoy) 등 한때 기업가치가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를 넘던 회사들이 줄줄이 폐업의 길로 들어섰다.
VC들은 창업기업보다는 이미 자리를 잡은 정보기술(IT) 기업으로 눈을 돌리거나 이미 포트폴리오에 편입시킨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재 미 VC 업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회사로 평가되는 스라이브캐피털은 자사가 이미 투자하고 있던 핀테크 스타트업 스트라이프에 18억달러를 추가로 넣었다. 이 회사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2대 주주로, 직원들이 보유한 우리사주 매입을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스라이브캐피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의 친동생 조시 쿠슈너가 차린 VC다.VC들은 기관투자자, 연기금, 재단 등 유동성공급자(LP)들로부터 거센 투자금 회수 압박에 직면해 있다. 미국에 본사를 둔 VC들이 지난해 LP들에 상환한 총자금은 210억달러로, 2021년의 7분의 1에 불과했다. 스타트업 시장에서 엑시트(투자금 회수)나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사례가 급감한 탓이다.한 익명의 VC 투자자는 FT에 “일반적으로 LP는 VC를 압박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지만, (VC가) 3년째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기에 접어들면 (펀드 운용) 수수료가 얼마인지 묻기 시작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VC는 투자 성과와 관련 없이 정해진 주기대로 LP에 운용 수수료를 부과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세쿼이아캐피털 등 일부 VC가 미집행 자본에 대한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사례도 나왔다.
전에 없는 전략을 활용해 창의성을 발휘하는 VC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컨티뉴에이션 펀드’다. 기존 펀드의 GP(운용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량 자산 등을 신규 펀드로 옮겨 투자하는 방식이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VC 중 하나인 라이트스피드가 현재 10억달러 규모의 컨티뉴에이션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VC 업계의 자금 고갈 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LP들이 팬데믹 기간 쌓아 올린 기록적 규모의 투자금에 대한 회수 의지를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안드레센호로위츠 등 혁신 VC는 암호화폐 투자를 명목으로 45억달러를 끌어모았다. 세계 최대 VC 타이거글로벌매니지먼트는 무려 127억달러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했다.아랍에미리트(UAE) 3대 국부펀드로 꼽히는 무바달라투자회사 산하 VC 무바달라캐피털의 이브라힘 아자미 대표는 “드라이파우더는 분명 존재하지만, 벤처 자금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며 “대부분이 초저금리 시대에 만들어져 고금리 시대 드러나기 시작한 ‘혼란’을 바로잡는 데 쓰일 전망”이라고 말했다.
명확한 수익 구조를 확립하지 못한 스타트업의 파산 확률은 더욱 높아질 거란 우려가 나온다. 투자은행(IB) 에버코어의 사모 투자 부문 책임자인 나이젤 던은 “어떤 면에서 드라이파우더는 신기루에 불과한, 이론적 수치에 불과하다”며 “VC가 투자한 포트폴리오 회사들이 느끼는 현금 조달 압박은 그 어느 때보다 크며, 수익성이 가시적으로 담보되지 않아도 투자금이 흐르는 수도꼭지가 계속 열려 있을 거란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지적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