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浪吟(낭음), 朴遂良(박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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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浪吟(낭음)朴遂良(박수량)

耳口聾啞久(이구롱아구)
猶餘兩眼存(유여양안존)
紛紛世上事(분분세상사)
能見不能言(능견불능언)

[주석]
* 浪吟(낭음) : 아무렇게나 읊다. 시인의 겸손이 반영된 제목이다.
* 朴遂良(박수량, 1475~1546) :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이다. 단상법(短喪法)이 엄하던 연산군(燕山君)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던 일 때문에 중종 반정(中宗反正) 이후에 고향에 효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용궁 현감(龍宮縣監)에 이어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를 지냈으나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자 강릉에 돌아가 조카 박공달(朴公達)과 함께 시주(詩酒)를 일삼으며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삼가집』이 있다.
* 耳口聾啞(이구롱아) : 이 대목은 ‘耳聾口啞(이롱구아)’, 곧 귀가 멀고 입이 벙어리가 된다는 뜻인데, 이를 명사적으로 표현하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라고 할 수 있다. / 久(구) : 오래, 오래 되다.
* 猶餘(유여) : 여전히 남다, 여전히 남은. / 兩眼存(양안존) : 두 눈이 있다.
* 紛紛(분분) : 분분하다, 어지럽고 뒤숭숭하다. / 世上事(세상사) : 세상사, 세상의 일.
* 能見(능견) : 볼 수 있다. / 不能言(불능언) : 말할 수 없다.[번역]
아무렇게나 읊다

태헌 번역

오래도록 귀머거리에 벙어리
여전히 남아 있는 두 개의 눈
어지럽고 뒤숭숭한 세상사는
볼 순 있어도 말할 순 없는 것[번역노트]
역자는 이 시를 감상하다가 자연스럽게 성인 ‘성(聖)’ 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聖’을 구성하는 요소인 귀 이(耳)와 입 구(口)가 시구(詩句)에 나란히 쓰이고 있는 데다, 이 시는 당연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짐작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聖’은 분명 정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글자이다.

문자학적으로 이 ‘聖’ 자는 높은 언덕 같은 곳에 올라 있는 사람[壬]이 큰 귀[耳]로 여러 사람의 의견[口]을 잘 들어 지혜롭게 대처한다는 뜻이므로, 그러한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라는 말이 된다. 옛날 사람들이 제왕(帝王)의 관형어로 ‘聖’ 자를 즐겨 쓰게 된 것은, 애초에는 완전한 인격체인 성인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바램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실상 힘을 가진 자와 그 혈족이 대를 이어 제왕이 되었으므로 그런 제왕들을 성인과 동일시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성은(聖恩), 성지(聖旨), 성안(聖顔) 등과 같은 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제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성상(聖上)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지도자라면, 마땅히 많은 의견을 골고루 듣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 터인데도, 자신의 마음에 거슬리기도 할 쓴소리 듣기를 싫어하여 위압적으로 언로(言路)를 막아버렸다면, 결코 성군(聖君)으로 칭해질 수 없을 것이다.박수량 선생이 “어지럽고 뒤숭숭한 세상사”를 “말할 순 없는 것”이라고 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을 말하면 일신이나 일족에게 화가 미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임금’은 선치(善治)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듣기’조차 제대로 안 되는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듣기가 제대로 안 되는 지도자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옛사람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직언(直言)해야 할 상황이 못 된다면 스스로가 물러나 홀로 자신을 가꾸었다. 박수량 선생은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자, 고향인 강릉(江陵)으로 돌아가 조카 박공달(朴公達)과 함께 시주(詩酒)를 일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박수량 선생이 “두 개의 눈”으로 “볼 순 있어도”라고 한 진정한 뜻은, 그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눈을 감으면 안 된다고 한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동조(同調)나 외면(外面)이나 비겁(卑怯)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불합리한 상황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말할 순 없는” 상황이라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역자는, 가능하다면 단순히 기억하는 단계를 지나 기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시나 일기나 그림과 같은 것으로 각기 저마다의 시대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쌓인 가혹한 시대의 기록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시대를 알 수 있겠는가! 비록 짧지만 박수량 선생의 이 시 또한 그 시대를 알게 해주는 하나의 역사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볼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는’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역자가 보기에 지금은 말을 할 수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말을 절제하지 않는 인사들이 너무 많아 듣는 사람들이 괴로운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함께하는 세상에 대해 자기 의견을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건강한 사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가 뱉은 말에 대해서는 마땅히 책임을 지게 하는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근거없는 토설(吐說)이 산처럼 쌓이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제지가 유야무야(有耶無耶)하다면, 그것은 자유(自由)가 아니라 이미 방만(放漫)이 아니겠는가!

역자는 몇 해 전에 이 시를 패러디하여 아래와 같은 희시 하나를 지어본 적이 있다. 보기만 하고 말하지[타이핑하지] 않는, 이른바 눈팅족을 위하여 이 희시를 지은 것인데, 이 임시에 중국 사람들은 눈팅족을 ‘은신족(隱身族:몸을 숨기는 자들)’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시의 제목에 반영해 보았다.

爲唯看不言者卽隱身族(위유간불언자즉은신족) 보기만 하고 말하지 않는 자, 곧 눈팅족을 위하여

耳口聾啞久(이구롱아구) 오래 귀머거리 벙어리로 살아도
兩眼兩手存(양안양수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손 있으니
多多網上事(다다망상사) 많고도 많은 인터넷상의 일들은
能見能打言(능견능타언) 볼 수도 말을 쳐넣을 수도 있는 것

역자가 오늘 소개한 박수량 선생의 「浪吟(낭음)」은 오언절구로 압운자가 ‘存(존)’과 ‘言(언)’이다.

2024. 2. 6.<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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