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AI에 도둑맞은 주의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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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석 테크&사이언스부장학창 시절만 해도 2절까지 외울 수 있는 노래가 많았다. 팝송을 외우겠다고 노트에 영어 가사를 베껴 적는 게 일상이었다.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노래방 문화가 확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젠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도 클라이맥스 몇 소절을 간신히 외울 뿐이다.
길 찾기도 부지불식간에 잃어버린 능력 중 하나다. 어느 날부터 차에 오르면 내비게이션을 켜고 주소를 입력하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가 됐다. 이전에 몇 번을 가 본 곳도 실수 없이 운전해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다. 좌회전, 우회전 지시를 따라가기 바쁘니 동네와 이름이나 길의 흐름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기술 발달이 인간의 퇴화 불러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인간의 특정 능력을 퇴화시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평균적인 현대인은 원시인보다 시각과 후각이 무디고, 근력과 지구력도 떨어진다. 목숨을 걸고 사냥터에 나갈 필요가 없어지자 해당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변화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해당 능력을 쓰지 않은 덕에 새로운 능력이 개화했고, 절약한 에너지를 다른 일에 쏟을 수 있었다.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특정 능력 퇴화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신기술들은 파급력이 심상찮아 보인다.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인 선택과 주의집중 능력을 빠르게 퇴화시키고 있어서다. 요즘 유튜브와 틱톡 사용자들은 이전보다 검색 버튼을 덜 누른다. 인공지능(AI)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용자들의 사용기록을 분석해 입맛에 딱 맞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토해내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AI가 나 대신 선택의 권한을 행사해주고 있다는 얘기다. 쇼핑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구매와 검색기록 등을 참고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내가 사야 할 물건을 제시한다.
주의집중 능력도 AI 알고리즘 앞에선 풍전등화다. 클릭을 부르는 취향 저격 콘텐츠, 지금 접속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만 같은 보상 시스템의 힘이다.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노라면 서너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AI와 XR 시대에 필요한 능
AI 알고리즘이 내 평소 생각에 반하는 콘텐츠를 알아서 걸러준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확증편향이 강해질 수 있어서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이 굳어지면 갈등 조절과 타협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신기술로 무장한 플랫폼의 ‘사용자 주의 강탈’ 시도는 앞으로 더 노골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은 최근 확장현실(XR) 헤드셋 ‘비전프로’를 내놨다. 12개의 카메라, 5개의 센서, 6개의 마이크를 장착한 제품으로 현실과 흡사한 메타버스 환경을 경험하게 해 준다. 2차원 모니터에 국한됐던 자극이 3차원 입체공간으로 넓어지면 AI 알고리즘의 파괴력은 한층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와서 새로운 기술의 흐름을 뒤로 돌리기는 불가능하다. 플랫폼 기업을 규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용자 체류시간=수익’이라는 플랫폼의 속성 때문이다. 결국 해법은 플랫폼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나침반’을 만드는 것뿐이다. AI 등의 신기술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깊이 빠지면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