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시간 보낸 소프라노 박혜상, DG에서 4년만의 신보 '숨'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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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 극심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음반"살아있는 동안은 빛나라/ 결코 슬퍼하지 말라/ 인생은 잠시 동안만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은 그 대가를 요구한다."
녹음 전 산티아고 순례길 하루 20여㎞씩 걸어"
2020년 한국인 최초로 DG 전속 아티스트
13일 롯데콘서트홀서 발매기념 리사이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 '세이킬로스의 비문'에 적힌 구절이다. 1~2세기 인물로 추정되는 세이킬로스가 아내의 죽음을 겪고 묘비명에 적은 문구다. 지난 2일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발매한 소프라노 박혜상(36)의 신보 '숨'(Breathe)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음반에서 세이킬로스의 철학을 반영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담았다.박혜상은 5일 오전 서울 서초동 코스모스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그는 “팬데믹 기간에 느꼈던 극심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한 음반”이라고 밝혔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잃게 되면서 힘든 시간을 겪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 외로움, 분노 등의 감정에 압도됐어요. '왜 사는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과 함께 음반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세이킬로스의 문구를 보고 큰 위로가 됐습니다."이번 음반은 박혜상이 2020년 데뷔 앨범 이후 4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음반이다. 준비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하던 그는 '혼자 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그래서 2022년 8월 배낭을 메고 25일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떠났다. 매일 20~30㎞씩 하염없이 걸었다.에어비앤비 숙박을 계기로 우연히 알게 된 이탈리아 왕족의 도움으로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 조각상을 보기도 했다. 앨범 이미지 사진을 찍기 위해 태국에서 프리다이빙을 배우는 도전도 단행했다. 박혜상은 이런 다채로운 경험들을 토대로 얻은 영감을 이번 음반에 녹여냈다.
"순례를 통해 여러 영적인 체험을 했고, 살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게됐죠. 너무 많이 애쓰고 가지려고 하기보다 그런 것들을 잠시 놓았을 때 세상이 주는 평안함이 있고, 그 안에 진정함 행복과 감사함이 흐른다는걸 느끼게 됐어요. "
앨범 수록곡들은 저마다 범상치 않다.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에 아베마리아 가사를 붙인 곡, 한국 작곡가 우효원이 아쟁 연주에 목소리를 얹은 레퀴엠(진혼곡) 형식의 한국 가곡 ‘어이 가리’가 대표적이다. 현대음악 작곡가 루크 하워드에게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넣어 의뢰한 편곡 작품 ‘While You Live’도 포함됐고, 현대음악 작곡가 비반코스가 작곡한 '보컬 아이스'도 수록했다. 보컬 아이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이다. 그는 “중구난방처럼 보일지 몰라도 세이킬로스의 비문에 담긴 메시지가 일관되게 흐르도록 앨범을 구성했다”며 "2년여간 모든 것을 쏟은 이 앨범으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고 소개했다.
박혜상은 세계 무대에서 활약중인 한국 대표 소프라노다. 서울대, 줄리어드 음악원 졸업 후 몬트리올 국제음악콩쿠르 준우승,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 자르주엘라(스페니쉬 아리아) 여성 부문 2위를 수상했다. 2020년엔 한국인 최초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도이치그라모폰(DG)에 전속 아티스트가 됐다. 이 레이블과 전속 계약을 맺은 성악가는 아시아권에서 그가 유일하다.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베를린 국립오페라 극장에서도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는 13일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새 음반 발매기념 리사이틀도 연다. 이후 미국 LA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등 교향악단과 협연을 앞두고 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