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팔다리 마비된 피아니스트 "왼손으로 치면 돼요" [이생망 리포트]

이생망 리포트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52)

독일·네덜란드 유학파 음악인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마비
포기하지 않고 왼손으로 연주 시작
양손 쓸 날 올거라는 희망 잃지 않아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 프로필 사진. / 사진=본인 제공
양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다.

초등학교 입학 전 피아노 교습소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에 푹 빠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 이훈 씨(52)는 목표를 세우면 늘 실행하기 바쁜 사람이었다. 독일,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며 음악의 깊이를 쌓았고, 세계적인 음악인이 되겠다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쓰고 있던 어느 날 이 씨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좌뇌가 60% 가까이 손상되면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됐다. 실어증에 걸려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음악 한길을 걷던 이 씨에게 사고는 불현듯 찾아왔다. 그는 "음악인이라는 정체성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이 씨는 곁에서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도와준 가족, 친구, 지인들 덕분에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고 이후 그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건 대수술 이후 반년 좀 지나서였다. 어릴 적 은사님이 그에게 "왼손으로 칠 수 있는 곡이 1000곡이 넘는다"라고 해준 덕분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위로가 아니라 확신의 말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 씨는 이후 매일 아침 피아노 음계를 반복해서 연습했고 연주곡을 연습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4년만인 2016년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로비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다. 2020년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한 ‘My Left Hand’ 독주회, 포스코 재단 초청 의료진 감사음악회, 2021 예술의전당 인춘홀에서 ‘이훈 피아노 독주회’ 등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는 "언젠가는 오른손으로도 자유롭게 연주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훈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포즈를 하고 있다. / 사진=본인 제공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52)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동네 문방구 앞에서 놀다가 우연히 들은 피아노 소리에 푹 빠져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선화예술학교에 진학했고 선화예고 2학년 재학 중 독일문화원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국립예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독일의 한 콘서바토리에서 강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논문을 쓰던 중 2012년 여름 불의의 사고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그날의 기억이 있나요?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납니다. 2012년 8월 16일 저녁 7시였습니다. 당시 독일 할머니의 2층짜리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던 중이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여는데 순간 피가 머리로 쏠렸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지럼증이 느껴졌습니다. 문을 잡고 쓰러졌습니다.평소 할머니는 저녁 7시가 지나면 자기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곤 했는데 그날은 저녁 7시가 되도록 1층에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텔레비전 앞에 계셨었습니다. 쿵 소리가 나서 할머니가 퍼뜩 달려와서 보니 제가 이미 쓰러져 있더라는 겁니다. 할머니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할머니가 없었으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사고 전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었나요?
"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뇌혈관 중 어디가 막혔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증상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이후 이훈 님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뇌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했습니다. 왼쪽 뇌의 60%가 손상되고 오른쪽 반신 마비는 물론 언어 장애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인 제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장애였습니다.▶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나요?
당연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컸습니다. 열흘 만에 의식을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가족, 후배들 얼굴은 알아보겠는데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몸을 제 마음대로 가누기도 어려웠습니다. 장애 때문에 피아노를 다시는 못 칠 거라는 생각에 절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살아난 것으로도 천만다행이더라고요. 반신불수가 된 제 곁에서 도움을 베풀던 가족들과 친구들을 보면서 사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미국 신시내티대학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4달이 지난 2012년 12월에 귀국했습니다. 집 근처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서 강도 높은 재활을 시작했고, 블록을 집어 틀에 끼워 넣는 연습과 손의 감각을 키우기 위한 치료를 이어갔습니다.

▶피아노 앞에 다시 앉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은사님의 권유 덕분이었습니다. 귀국 후 선화예술학교 시절 지도해주신 전영혜 선생님(경희대 명예교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은사님의 한 마디가 저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세상에 피아노를 잘 치는, 좋은 연주자는 참 많다. 그런데 왼손 피아니스트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왼손을 위한 연주곡은 1000곡이 넘는다. 넌 할 수 있다. 해 보자 훈아.”

치료 중에 다시 피아노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교수님의 응원을 받으며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무작정 한 손으로 연주를 시작해보니까 어땠나요?
움직임이 더디고 느려서 답답했어요. 전에는 쉽게 하던 것들을 이제는 몇백 번 더 연습해야 가능한 상태였으니깐요.

악보 암기도 제게는 큰 산이었어요. 뇌졸중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써 온 영어를 다 까먹었어요. 음악인 중에 피아니스트만 유일하게 악보를 다 외워서 무대에 서거든요. 긴 악보를 머리에 넣는 것도 큰일이 되었죠.

▶양손 연주와 한 손 연주는 어떻게 다른가요?
원래는 왼손으로 반주하고, 오른손으로는 멜로디를 쳐요. 왼손으로만 치면 반주와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해야 해요. 매일 연습하는데도 아직도 적응이 안 됩니다.

더 큰 애로사항은 페달입니다. 왼쪽 팔과 다리를 동시에 쓰니까 균형 잡기 쉽지 않아요. 오른쪽 다리 힘을 키워서 오른발로 페달을 자유롭게 밟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다시 공연을 한 날은 어땠나요?
수술받은 지 4년만인 2016년에 서울성모병원 로비에서 첫 연주회를 진행했습니다.
이성을 담당하는 기관인 왼쪽 뇌가 손실되니까 역설적으로 감성이 풍부해졌어요.
전에는 현란한 테크닉, 연습 효율을 많이 따졌어요.

“어떻게 하면 멋지게 연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고민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날 연주를 들은 아는 피아니스트가 제게 음악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말하더라고요.

더 놀라운 일은 신시내티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지도하던 교수님이 그날 연주회에 있었던 거예요. 논문을 제출하지 못해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제 사정을 아셨던 교수님은 제게 7번의 연주회를 마치면 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저는 미국으로 떠났고, 2017년 8월 신시내티대학에서 음악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장애를 딛고 음악을 다시 하면서 이훈 님이 음악을 대하는 마음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오히려 피아노 치기에는 더 좋죠.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게 뭔지 더 알게 됐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저는 연주자였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위로받고 또 마음을 나눠 주는 친구가 됐다고 생각해요. 왼손 피아니스트로서 다시 삶을 살아 내겠다는 결정이 준 선물이죠.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계세요. 어떤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어요. 지난달에 부산에서 독주회 했고, 다가오는 3월에 모두예술극장에서 또 공연이 있습니다.

사회적기업 '툴뮤직' 장애인 예술단 소속 아티스트로 연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툴뮤직은 음악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이훈 님의 향후 목표는?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오른손으로 스케일(음계) 연습을 합니다. 앞으로 몇십년은 더 연주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오른손으로도 자유롭게 연주하는 날이 올 거라 믿어요.살다 보면 절망과 좌절을 안기는 일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 안고 다시 한발짝 나아가보기로 마음 먹으면 살아내지더라고요. 우리 모두 당당하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