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미식가' 원래 모델은 여성…아재로 바꾼 이유는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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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식가' 원작자, 구스미 인터뷰①"'고독한 미식가'의 원래 모델은 여성이에요. 하지만 남성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죠. 원작을 처음 그릴 때(1994년)만 해도 여성이 혼밥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일본은 중년 남성이어서 혼밥한다"
"'여성 혼밥'의 역사는 길지 않아"
"대식가 주인공은 설정…양은 역시 한국"
'직장인이 점심값으로 4천엔?…대신 술 안마시잖아"
윤석열 대통령이 "꼭 챙겨 본다"고 말해 화제가 된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의 원작자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지난 10월27일 도쿄 기치조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작품을 만들면서 사회적인 의미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오직 재미 만을 위해 일한다고 했다.하지만 그가 그린 배경과 인물 설정, 대사 한 줄, 인터뷰에서의 답변 한마디 한 마디에는 지난 30년간 일본이 경험한 사회·경제적 서사가 진하게 녹아 있었다. 구스미 작가도 인터뷰 내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를 연발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고독한 미식가' 예찬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대식가 답게(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에 오셔서도 엄청 많이 드셨더라구요."
▶일본 미디어와 인터뷰에선 "한일관계 개선에 공헌해서 자랑스럽다"고도 했습니다. 술과 음식 그리고 만화 같은 콘텐츠의 힘을 믿나요.
"맛있는거 먹으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지 않나요. 상대국의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서 그 나라 험담하려는 생각은 안 들잖아요."▶드라마 고독한 미식가가 처음 방영됐을 때(2012년) 한국인들은 중년 남성이 혼자 밥을 먹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최근엔 한국도 꽤 변했다지만 부장, 차장급인 중년 남성이 혼밥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고독한 미식가를 처음 그릴 때는 일본 역시 여성의 혼밥은 확실히 없었어요. 소바나 라멘, 규동 집은 여자 혼자 가는 데가 아니었죠. 일본은 거꾸로 중년 남성이니까 혼밥을 할 수 있었어요." (일본 최초의 규동 체인인 요시노야에 따르면 10년 전 매장 고객은 거의 100% 남성이었다. 현재는 고객의 30%가 여성이다. 테이크아웃 고객은 여성이 절반이다.)
▶원작 만화의 주인공은 보다 젊고 까칠한 남성이었는데요.
"원래 모델은 요코하마에서 수입 잡화 사업을 하는 여성이었어요."
▶그런데 왜 원작 만화의 주인공은 젊은 남성, 드라마에선 소심한 중년 남성이 됐나요.
"중년 남성이 아니면 혼밥을 못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혼자서 제대로 밥벌이를 하면서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일을 하는 인물상을 찾은 결과에요."▶일본인은 적게 먹는 이미지인데 실제로는 주인공처럼 많이 먹냐고 궁금해 하는 한국인들도 많습니다.
"그건 출연한 가게의 요리를 다양하게 소개하기 위한 드라마 상의 설정이죠. 거꾸로 한국에 가보니 양이 많아서 정말 놀랐어요. 이건 이노가시라 고로(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라도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던데요. 게다가 반찬 등이 얼마든지 리필이 되잖아요."
▶등장한 가게들이 '고독한 미식가 세트', '고로 세트' 같은 메뉴를 내놓는 경우가 많다구요.
"보통의 일본인은 주인공이 주문한 요리들을 도저히 한 번에 먹을 수 없으니 조금씩 모둠으로 해서 내놓는 거죠."
▶일본인 지인들은 '주인공의 매 끼니 식사비가 점심 기준으로도 3000~4000엔(약 2만7600~3만6800원) 꼴인데 일본인 직장인치고 밥값을 저렇게 많이 쓰면서 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없다'라는 지적도 하더군요.
"대신 주인공은 술을 안 마시잖아요. 그 점을 감안하면 점심값으로 3000~4000엔 정도는 괜찮잖아요."▶SNS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도 '혼술', '혼밥', '차박', '솔로 캠프' 같이 '혼자서'를 추구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그건 유행의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SNS로 연결성이 강해질 수록 역설적으로 더 고독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전 작품 만들 때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한 프랑스 미디어는 주인공이 백화점 옥상에서 혼자 우동 먹는 장면을 들면서 '여기서 혼자서 우동을 먹는게 왜 맛있나요? 자신과 마주해서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까?'라더라구요. '아니오, 저는 다만 우동과 마주하고 우동을 먹고 있는데요'라고 답할 수 밖에요."
▶작품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지만 "거품(버블)경제 붕괴로 일본 경제가 나빠졌을 때 묘하게 맛집을 찾는 붐이 생겼다"고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를 처음 썼을 때가 일본에서 처음 맛집 붐이 일어났을 때이긴 해요. 그래도 전 그런 조류와 관계가 없었어요. 맛집, 여자친구에서 점수 따는 레스토랑 같은 거 전혀 몰랐어요."
▶경기와 혼밥은 비례관계인 걸까요. 일본에선 불경기일 수록 요코초(작은 술집·식당이 밀집한 좁은 골목길)가 번성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요코초는 싸니까 경기가 나빠지면 번성할 수 있겠네요. 경기가 엉망이면 서민 식당을 가게 되지, 비싸고 근사한데 돈을 쓸 수 없잖아요." '고독한 미식가' 원작자, 구스미 인터뷰②로 이어집니다.
☞구스미 마사유키는
1958년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에서 태어나 바로 옆 동네인 기치조지에서 평생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노가시라 고로'라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름도 원작을 그릴 때 살던 집 주소 '기치조지 이노가시라 5번지(일본어로 고로)'에서 땄다. 호세이대 사회학부를 졸업했다.
1981년 단편만화 야행으로 데뷔했다. 고독한 미식가는 1994~1996년 연재한 작품이다. 원작이 10년이 지나 다시 인기를 끌면서 2012년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에세이 작가와 책 디자이너, 음악가이기도 하다. 18살 때 결성한 밴드 스크린톤즈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시즌 10'까지 제작된 고독한 미식가에는 매 시즌 40~50곡의 배경음악이 사용되는데 모두 스크린톤즈의 곡들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