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와 고급 주택단지 [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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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35. 미동아파트(경성 대화숙), 현대(개명)아파트와 금화장 주택지아파트 홍수 시대다. 이곳에는 유독 특이한 아파트들이 많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녹색 건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 아파트'다. 2030년이면 지어진 지 백년이 되는데 아쉽게도 28층의 주상복합 건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입주민들은 이 허름한 아파트에 사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6.25 전쟁, 개발 시대를 지나온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이 아파트가 사라진다고 하니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경찰청 옆의 물길 위에 세워진 서소문 아파트도 재건축으로 사라진다. 만초천의 휘어진 물길을 아파트의 곡면으로 짐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건물이다. 아쉬움이 남는 분들은 이 아파트들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보시라.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한 건물이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굴곡진 세월을 따라 울고 웃는 생명체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일부분은 잘리기도 했고 금가기도 했다. 상처가 깊은 피부, 늙어서 주름이 깊게 패인 어르신, 딱 그 모습이다.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은 중림동 약현성당을 길게 감싸고 있는 성요셉 아파트이다. 1971년생인 서소문 아파트와 비슷한 나이의 성 요셉 아파트는 중림동 일대가 재단장을 하면서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굴곡진 약현의 경사면을 밀어내지 않고 지어 아파트 남북 면의 층수가 다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높은 언덕을 걷어낸 후 지었을 것이다. 성문 밖에는 이처럼 나름대로 개성 있고 사연 있는 아파트들이 많다.충정 아파트 건너편에서 서대문 사거리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면 도로 안쪽에 있는 한 동짜리 아파트가 보인다. 미동 아파트다. 이곳의 여느 아파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1969년에 지어졌다. 길게 드리워져 많은 세대수를 자랑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자리에 있던 1940년 지어진 경성 대화숙 <京城大和塾, 게이죠 야마토 주쿠>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아파트이다. 건축가 황두진이 쓴 <가장 도시적인 삶>에 그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식산은행의 독신자 숙소로 쓰였던 아파트다. 그러고 보니 대각선 방향에 있는 '충정각'에서 살았던 일본인도 식산은행 비서실에 근무하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 산업정책을 뒷받침했던 식산은행은 식민지 자본을 수탈하는 전초 기지였다. 해방 후 '한국 식산은행'으로 이름을 바꿨고, 1954년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됐다. 현재 명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식산은행에서 이곳까지는 전차를 한 번 갈아타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아파트 건너편, 현재의 미동 초등학교 부근에는 전차 역인 죽첨역이 있었다. 이렇다 보니 출퇴근이 용이한 이곳에 직원 숙소가 생겼다. 시내에 직장을 둔 많은 샐러리맨이 이곳에서 살았다. 경성대화숙은 월북 작가 김남천이 1941년에 쓴 소설, <맥>에도 등장한다. 소설 속 이 아파트의 이름은 '야마토(大和) 아파트'다. 목조 2층 건물로 독신자용 방이 36개, 두 칸짜리 가족용 방이 25개, 총 61세대, 130명 정도가 모여 살았다. 소설 속 여주인공 최무경은 이 아파트의 사무원이다.“맞은편 캄캄한 언덕의 주택지에는 불빛이 빤짝거린다. 하늘에도 까만 허라이즌 위에 뿌려놓은 듯한 별들, 마포로 가는 작은 전차가 레일을 째면서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 굽어 보인다. 산뜻한 밤공기에 쏘이면서 천천히 가슴의 동계를 세어본다." <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삶, 반비출판사, 61페이지 재인용>야마토 아파트(경성대화숙, 현 미동아파트 자리)에서 보이는 언덕의 주택지는 금화산 자락에 펼쳐져 있는 '금화장' 문화 주택단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이 지역이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경찰청 자리에 있던 5층 건물 연초공장이 가장 높았다. 번화한 거리임에도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왔다. 지금은 오지에서나 볼 수 있는, 무수한 별들이 밤 하늘에 박혀있다가 막 쏟아지는 유성 축제가 매일 벌어졌다. 그만큼 오염이 안 된 동네인지라 문을 열면 불어오는 청신한 바람이 가슴을 뻥 뚫었다. 창문 밖 충정로 큰 길에는 서대문에서 마포종점으로 가는 전차가 꾸물꾸물 아현 고개를 넘어간다. 낭만적인 밤 풍경이다. 이 전차에는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들과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꾸벅꾸벅 조는 청춘들이 탔을 것이다. 아니면 새우젓을 팔기 위해 새벽부터 시내로 나갔다가 빈 새우젓 통을 들고 마포종점으로 가는 아낙이 탔을지도 모른다.
미동아파트 옆을 보니 현대 아파트가 보인다. 현대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다. 이 자리에는 1959년에 세워진 6층짜리 '개명아파트'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식 아파트인 마포주공아파트가 10층인데, 그 전까지는 이 6층 아파트가 최고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으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최고 높이가 6층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 이후 주택의 파괴, 피난민의 증가, 이농현상, 베이비부머의 증가로 서울의 주택은 태부족이었다. 당연히 좁은 땅에 높이 올려야 했다. 용적율 높은 고층 아파트를 짓다보니 당시로서 최고층인 6층 아파트가 이곳에 세워졌다.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1957년에는 민간건설사인 중앙산업이 중앙아파트(현 주교동 중앙프라자)와 종암아파트(현 종암SK아파트)를 지었고, 1959년에는 이곳에 개명아파트를 세웠다.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 아파트 격인 종암아파트 낙성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였다. 대통령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수세식 화장실을 극찬했다. 모든 집들이 '푸세식'일 때 실내에 화장실을 넣었다. 이곳의 개명아파트도 중앙산업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개명아파트가 노후되자 1992년 현대 아파트가 세워졌다. 놀라운 것은 아파트를 철거하니 철근이 나오지 않고 기차 레일이 나왔다. 개명아파트는 얼마나 공들여 튼튼하게 지은 것인가. 현대아파트(개명현대아파트)는 재건축 1호 아파트로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경성대화숙 자리에 미동아파트, 그 옆 현대아파트 자리에 개명아파트가 지어진 것이다. 충정아파트(1930년), 경성대화숙(1940년), 개명아파트(1959년), 미동아파트(1969년), 현대아파트(1992년) 들이 마치 한 집안의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같이 같은 동네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들어섰다. 이 아파트 북쪽에는 아파트와는 다른 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김구선생이 임시정부 청사와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들어가기 전에 묵었던 이화장(梨花莊)과 같이 유명인사가 살던 큰 주택을 장(莊)이라는 이름을 붙여 택호로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유원지나 별장에 ‘원(園)’이나 ‘장(莊)’을 붙여 주택을 만든다. 일제 강점기 시절, 경기대 뒤편에 ’금화장(金華莊)‘이라는 문화주택 단지가 있었다. 후암동과 장충동의 문화주택단지와 함께 이곳 금화산 문화주택단지는 경성의 3대 주택지로 손꼽힐 정도로 입지가 탁월했다. 동네를 돌아보니 일본가옥, 높은 축대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도의 서북에 그 문화를 전하는 금화장은 경성에서 손꼽는 주택지이다. 북은 녹음의 금화산에 둘러싸여, 사계절의 풍경이 좋다. 금화원이 잇고 남향이며, 토지고조, 공기청정, 주택자로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금화산에 이어진 금화장 아름다운 이름이 아닌가." (경성일보 1930년 11월17일자.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도서출판 집 304페이지)
금화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이 지역은 살기 좋은 동네였다. 죽첨역이 가까워 역세권이었고, 서대문소학교, 미동보통학교, 죽첨보통학교와 같은 초등교육 시설과 이화, 배재, 연희 전문학교등 고등 교육시설이 근처에 있어 전차 통학이 가능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종합병원 성격의 적십자병원이 있어 위급상황에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서대문 경찰서가 있어서 치안에 어려움이 없었다. 우체국 등의 편의 시설, 동양극장과 같은 문화시설이 모두 구비된 살기 좋은 동네가 이곳 성문 밖 충정로였다.<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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