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은 바닥나도 예술은 영원하다…사막 위 '문화의 꽃' 피우는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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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시는 문화전쟁 중]①강대국의 조건, 컬처시티
사우디 '누어 리야드' 예술작품 120여점 전시
17일간 '빛으로 물든 사막도시' 연출
아부다비, 해안가 '루브르 박물관' 세계적 명소로
내년 목표로 구겐하임 미술관도 건설중
중동 문화예술을 '22세기 유전'으로 보고 집중 투자
미국 유럽도 더 나은 문화시설 위해 자본 쏟아부어
‘세계화는 끝났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무엇이 재편할 것인가.’
글로벌 무역과 정보기술(IT)이 주도한 세계화 속도가 둔화하는 가운데 각국이 고심하는 화두다. 20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였다. 인류의 모든 문명이 자본과 기술을 가진 소수 국가에 의해 하나의 체계로 수렴했다. 국가 간 경계와 문화적 다양성은 자연스럽게 흐려졌다. 세계화는 ‘위기의 세계화’이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이 결정적 증거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각국은 문화예술에서 찾고 있다. 숫자가 보여준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세계 예술시장 규모는 2022년 4410억달러(약 588조원)에서 지난해 5795억달러(약 772조원)로 커졌다. 박물관과 공연장, 문화예술 관련 축제와 박람회 등을 합친 수치다. 세계 반도체시장 규모(약 800조원)에 육박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문화예술이 미래의 핵심 자본이자 국격을 좌우하는 힘’이라는 믿음을 국경을 넘어 퍼뜨린 도화선이 됐다. 2021년 전 세계에 등장한 문화 시설 관련 프로젝트는 211건, 총금액은 112억달러를 넘어섰다. 2022년엔 150억달러 이상 규모의 문화예술 시설이 전 세계 도시에 들어섰다.
문화전쟁엔 국경이 없다. 석유로 막대한 부를 쌓은 중동은 이제 마천루 경쟁에서 벗어나 미술관과 박물관, 콘서트홀 등 문화예술 인프라 투자에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이미 탄탄한 문화예술 인프라를 갖춘 미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새로 지어진 문화예술 시설 투자 중 상위 3개는 미국 플로리다의 올랜도 필립스공연예술센터(약 8128억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박물관(약 7675억원), 미국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 게펜홀(약 7328억원)이었다. 영국은 맨체스터에 지난해 300억원을 투자한 다목적 예술 공연장 아비바스튜디오를 개관했다. 현대미술의 보고인 런던 테이트모던 개관(2000년) 이후 최대 규모 예술 부문 투자였다. 미국 뉴저지주 북부 저지시티는 북미 지역 최초로 프랑스 퐁피두센터 분관을 유치해 2026년 개관을 앞두고 있다. 아르떼는 ‘세계 도시는 문화전쟁 중’이라는 주제로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이 왜 문화산업에 집중하는지 분석하고 예술로 국격을 높이는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할 예정이다. 김보라 기자
“사우디아라비아를 세계 최대의 ‘벽 없는 갤러리’로.”사막과 석유, 마천루의 이미지가 전부였던 중동은 지금 전 세계에서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탈바꿈 하고 있다. 중동 각국은 문화예술 산업을 마르지 않는 ‘22세기 유전’으로 보고 2030년까지 수천 억원의 예산을 앞다퉈 투입할 계획이다. 미술관 하나 잘 지어 해당 지역의 국내총생산(GDP)만큼의 수익을 벌어들이는 ‘제 2의 빌바오 효과’를 노리는 측면도 있지만, 문화 인프라의 발전 정도가 그 나라의 국격을 높이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게 그 배경이다.
지난해 11월 30일 건조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는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예술 작품 120여 점이 들어섰다. 고층 빌딩과 모래 사막 곳곳에 세계 35개국 100명의 현대미술가들이 대형 작품들. 리야드 시내는 물론 금융지구, 공원 등 도심을 둘러싼 5개 주요 장소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누어 리야드(빛의 축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 축제에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프랑스계 스위스 예술가 줄리안 사리에르의 '현기증', 코펜하겐에 기반을 둔 예술집단 수퍼플렉스의 '수직이동' 등이 출품돼 17일 간 ‘빛으로 물든 사막 도시’가 연출됐다. 총감독은 파리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를 만든 제롬 상스.
아부다비 간 루브르, 연100만 명씩 찾는다
중동의 문화예술 투자는 일회성 축제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 아시아의 예술가나 기관, 단체와 적극적으로 손을 잡는 한편 자신들의 전통 문화와 자연유산, 현지 예술가들과 융합시키는 영리한 전략으로 승부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부다비, 두바이 등은 앞다퉈 유럽 문화의 상징인 퐁피두, 루브르 등의 분관을 유치하고,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영입해 박물관과 음악당 등 오래 남을 랜드마크를 짓는다. 미국 라스베가스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세계 최대의 반구형 공연장 ‘스피어’도 현재 아랍 에미리트 4~5개 도시가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동 문화 예술 붐의 시작은 아부다비였다. 2007년 프랑스 정부와 협약을 맺고 약 10년에 걸쳐 파리의 상징이었던 ‘루브르 박물관’을 아부다비 해안가에 지었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건축물 자체로도 화제를 모았는데, 7850개 구멍을 뚫은 7000의 거대한 은색의 돔 구조물이 마치 바다에 떠있는 것처럼 설계했다. 2017년 개관하자마자 2년 만에 200만 명의 관람객이 찾았고, 지금도 연간 약 100만 명이 다녀가는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루브르 효과’를 톡톡히 본 아부다비는 내년 개관을 목표로 사비야트 섬에 구겐하임 미술관도 짓고 있다. 빌바오 구겐하임을 지은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를 맡았다. 몰입형 미디어아트의 선두주자인 일본 팀랩은 1만7000㎡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팀랩 페노메나’를 아부다비 사우디야트에 건설 중이다.
8천년 역사의 모래 사막 위에서 피카소와 앤디 워홀을
아부다비에 이어 요즘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다. 무함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석유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북부 사막 지역에 서울의 44배 넘는 면적의 친환경 스마트 도시 ‘네옴시티’를 짓고 있다. 여기에 투입되는 자금만 5000억달러(약 700조원). 미래 도시 건설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문화예술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고대 문명도시이자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알울라’를 문화 수도로 점 찍고, 2030년까지 창조 산업의 핵심 기지로 육성하는 중이다. 수천 년의 세계문화유산과 가장 최신의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세계 어디에도 없던 문화예술 도시를 짓는다는 청사진이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사우디는 거대한 유리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는 ‘마라야 콘서트홀’을 3년 전 개관했다. 세계 최대 거울 건축물 기네스 기록도 세웠다. 콘서트홀은 26m의 높이, 40mx15m의 거대한 무대, 500석의 객석에서 자연을 향해 완전히 열리고 닫히는 800㎡의 거대한 문이 압도적이다. 비슷한 시기 사우디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국제 야외 미술 축제 ‘데저트X’도 유치했다. 올해 세 번째로 지난 9일 개막한 ‘데저트x알울라’는 리야드 북서쪽 1100㎞ 떨어진 고대 문명도시 알울라 사막에 펼쳐져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한국인 개념미술가 김수자 등 전 세계 17명의 예술가가 참여해 드넓은 사막 절경 곳곳에 설치작들을 흩뿌렸다. 올해 이 인근엔 ‘퐁피두 퍼스펙티브 갤러리 알룰라’도 문을 연다. 연간 약 200만유로(약 29억원)를 투입해 ‘세계 최대의 살아있는 박물관’을 건설 중인데, 완공되면 수천 년의 고도 안에서 앤디 워홀에서 피카소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사우디 정부는 알룰라에 길이 22.5㎞의 몰입형 트램웨이를 건설하고 고대 유물과 랜드마크 컬렉션을 보호하기 위한 디지털 인프라도 구축한다. 사우디 정부는 네옴시티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2030년 문화 부문에서만 연간 200억달러의 수익과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GDP의 3%를 문화산업에서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암 알-마다니 사우디 알룰라 왕립위원회 최고경영자(CEO)는 “20만 년의 인류 역사, 8000년의 초월적 문명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알룰라 지역의 잠재력을 활용해 사우디가 문화 부문의 글로벌 선두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문화는 그 자체로 삶의 일부이자, 마르지 않는 인류의 미래”라고 밝혔다.
세계는 지금 문화 전쟁 중
중동의 변화는 결국 자본이 있는 곳에 문화 예술이 모여들고, 그것이 더 부강한 미래를 가져다 준 역사가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유럽과 미국은 경제 부흥기에 수 많은 문화 예술 수집가와 기부자들이 예술의 후원자로 나섰고, 이로 인해 관련 인프라가 꽃을 피우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문화전쟁은 국경이 따로 없다. 이미 최고 수준의 문화예술 인프라를 갖춘 미국과 유럽 각국도 더 나은 문화 시설과 예술가 육성에 더 많은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 영국 정부는 맨체스터 시의회와 손잡고 지난해 10월 3000억원을 투자한 1만3006㎡ 규모의 다목적 예술 공연장 ‘아비바 스튜디오’를 개관했다. 현대미술의 보고인 런던 테이트모던 개관(2000년) 이후 최대 규모의 예술 부문 투자였다. 이 프로젝트의 향후 10년간 경제효과는 11억파운드(약1조8375억원)로 추정된다. 미국 뉴저지주 북부 저지시티는 북미 지역 최초로 프랑스 퐁피두센터 분관을 유치해 2026년 개관을 앞두고 있다.문화산업 부문 글로벌 컨설팅그룹 AEA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전 세계에서 완공된 박물관과 공연장 수는 211건으로 역대 최다였다. 문화예술 인프라 투자에 관한 대륙별 순위(2022년 기준)는 북미(104건), 유럽(59건), 아시아(39건), 중동(8건), 아프리카(2건), 남미(1건) 으로 집계됐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