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마법…100년 먹고 살 문화예술 도시를 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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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시는 문화전쟁 중]①강대국의 조건, 컬처시티미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자, 뉴욕의 상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고대 이집트부터 유럽과 미국, 아시아에서 모인 300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흔히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민간의 기증으로 탄생한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을 세계 예술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
LA 게티빌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도 기부로 탄생
"더 많은 사람과 예술이 주는 기쁨 공유"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다른 두 곳과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그 태생이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이 왕실 보관품이나 제국주의 시대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예술 작품들을 토대로 국가 차원에서 건립했다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철저하게 민간의 기증으로 세워졌다. 1866년 파리에 살던 미국인들이 미국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미국에도 이제 명품 미술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뜻을 모은 게 계기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70년 그 뜻에 동참한 변호사, 사업가, 예술가들은 십시일반으로 기금과 기증품을 모아 소규모로 뉴욕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개관했다. ‘더 메트’의 등장은 미국의 국격을 높이는 분기점이 됐다. 20세기 초 산업화 시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미국인들을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 의식에서 벗어나게 했고, 부를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미술관들을 짓게 했다. ‘더 메트 효과’는 뉴욕을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고, 쇼비즈니스와 상업 예술의 메카였던 도시를 ‘영원불멸의 명화 한 점을 보러 찾아오는’ 명품 도시로 만들었다. 154년 전 ‘더 메트’가 미국 기업가들에게 심어놓은 예술 사랑의 DNA는 현재진행형이다.
서부엔 게티, 동부엔 구겐하임
미국 최대 석유 재벌이던 J.폴 게티(1892~1976)는 다른 영역에선 소문난 구두쇠였지만 미술품은 광적으로 수집했다. 20대 초 이미 막대한 부를 거머쥔 그는 로스앤젤레스(LA)에 게티빌라와 게티센터라는 두 개의 보석같은 미술관을 남겼다. 당시 건축비만 13억달러 이상(약 1조 7000억원)을 투입해 진도 7.5에도 끄떡없는 수장고와 연구소, 전시관을 지었다. 사망 후에도 7억달러 넘는 유산을 미술관에 기부하고, 소장품과 부동산 등을 모두 재단에 넘겼다.LA게티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돼 한해 180만 명 이상이 찾는다. 게티 인스티튜트에서 만난 앤드류 퍼척 부회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복원 전문가들이 있어 유럽의 명화, 손상된 건축 도면들이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온다”며 “지구가 멸망해도 게티의 수장고만 무사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새로 쓸 필요가 없다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고 했다. 게티 재단은 미술뿐만 아니라 출판, 음악, 예술 교육 등 LA 지역을 넘어 전 세계 예술가와 연구자들 간 네트워크를 만들어 레지던시와 연구비 등을 지원한다. 서부에 게티가 있다면, 동부엔 20세기 전설의 여성 컬렉터이자 예술 후원가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있다. 광산 재벌의 손녀로 태어난 구겐하임은 20대 초반 엄청난 부를 상속 받았지만 여느 상속자들과 다르게 살았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문화예술에 눈 떴고, 파리로 떠나 미술을 배웠다. 현대미술에 안목이 뛰어났던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화가 100여 명의 작품 수백 점을 사들였다. 현대미술의 주 무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없었다면 살바도르 달리도,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 “누군가는 한 시대의 미술을 보호해야 한다”고 외쳤던 그 역시 사후 모든 소장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페기 구겐하임 재단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빌바오와 독일 베를린의 구겐하임 미술관, 이탈리아 베네치아 미술관 등을 운영하며 여전히 현대미술의 정점에 서있다.범죄도시의 얼굴 바꾼 ‘예술 후원자’
최근 20년 간 범죄도시 마이애미를 문화예술의 명품 도시로 만든 주역들도 예술을 사랑하는 지역 부호들이다. 주로 부동산으로 부를 일으킨 이들은 세계 미술 시장의 큰손 컬렉터이자 지역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거듭났다. 루벨 미술관, 드라크루즈 컬렉션, 페레즈, 마이애미현대미술관(ICA) 등이 그렇다.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부동산 사업가인 호르헤 페레즈(1949년생)는 마이애미미술관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2000만달러 상당의 중남미 미술 컬렉션을 기증하고, 추가로 2000달러를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2013년 ‘페레즈 아트 뮤지엄 마이애미(PAMM)’로 이름을 바꾼 이 미술관은 라틴 미술의 성지가 됐다. 쿠바계 이민자인 카를로스 드 라 크루즈 부부는 1970년대부터 마이애미에 살며 컬렉팅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비영리단체 ‘무어 스페이스’를 세웠다. 마이애미 디자인 지구 안에 ‘드 라 크루즈 컬렉션’을 열어 현대미술 작품을 무료 공개하고 있다. 루벨 뮤지엄은 유명 컬렉터 루벨 부부가 7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 박물관. 신진 작가들을 대거 양성하는 체계적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유명한데, 스타 흑인 작가인 아모아코 보아포도 여기서 탄생했다. 워싱턴D.C.에도 루벨박물관을 연 메라 루벨은 “우연처럼 수집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이 주는 기쁨과 의미를 나눠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벤처 자선가들의 땅이 ‘명품 미국’ 만들다
미국 기업가들의 문화예술 기부는 미술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때 미국 최대 언론사였던 나이트-라이더의 소유주였던 존과 제임스 나이트 형제는 독립 민간 재단인 나이트 재단을 1950년 설립해 저널리즘 교육과 후원에 모든 재산을 바쳤다. 현재 마이애미 기반의 나이트재단(Knight Foundation)은 할아버지대부터 손자까지 3대에 걸쳐 문화예술 분야와 지역 커뮤니티, 저널리즘에 이르는 방대한 후원활동을 하고 있다.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MIT, 미시간, 메릴랜드, 스탠퍼드대가 참여하는 펠로십은 물론 16개 주의 빈민가를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수십 년간 해오고 있다. ‘LA의 천사’로 불렸던 억만장자 일라이 브로드(1933~2021)도 있다. 주택 건설사 카우프만과 브로드를 공동 창업하고, 금융서비스 기업인 선아메리카를 만든 그는 2015년 1억4000만달러를 들여 LA도심 한복판에 벌집 모양의 새하얀 건축물 브로드미술관을 지었다. 스스로를 ‘벤처 자선가’로 부르던 그는 부인과 함께 과학, 의학, 교육 분야에 20억달러를 기부하고 하버드 MIT와 함께 세운 생물의학 및 유전자 연구기관 브로드인스티튜트에 6억달러를 쾌척했다. 미로, 마티스, 모딜리아니, 반 고흐 등의 명작에서 현대미술까지 40년간 모은 2000여 점의 미술품을 “LA 시민들에게 무료로 공개하겠다”며 3층 높이의 대형 미술관을 지었다. 개관 후에도 2억달러를 추가로 기부하며 평생 모은 자산을 기꺼이 내놨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열기 이전에도 LA현대미술관(MOCA)의 창립 회장으로, LA 월드디즈니콘서트홀의 2억2000만달러 모금을 주도하면서 판자촌이 많던 LA다운타운을 ‘예술지구’로 변화시킨 주역이다.마이애미·뉴욕·LA=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