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의 제제, 가난의 대물림과 헤크먼 방정식

[arte] 조원경의 책 경제 그리고 삶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브라질 상파울루 주변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1968년에 탄생한 이 소설은 한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이야기다. 소설에서 실직한 아버지를 둔 가난한 집의 다섯 살 꼬마 제제는 어린 시절 동화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양극화가 세계적인 현상인 가운데 브라질에는 아직도 판자촌이 즐비하다.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파벨라(favela)’라 불리는 판자촌에 산다. 이곳은 폭력과 마약의 상징으로 불린다. 판자촌에 해가 저물어 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골목 한 귀퉁이에서 제제가 뛰어나온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가수 아이유의 노래에 맞춰 제제가 춤을 춘다. 아이유의 노래 가사가 들려온다.
“흥미로운 듯 씩 올라가는 입꼬리 좀 봐 (중략)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색과 풍경을 노래 부르네 yeah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못써”
아이유 앨범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어린아이도 자존감이 있다. 어린아이도 악마성이 있다. 나쁜 마음을 갖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 우리 내면의 악마성은 자칫 방치하면 큰 사고로 비화한다. 그래서 가난한 어린아이에게 구세주 역할을 하는 이야기는 소설의 단골 메뉴다. 제제가 그의 ‘소통과 배려’의 대상이었던 뽀르뚜까(포르투갈 사람이라는 뜻)에게 아빠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제제처럼 가난한 아이들이 차고 넘친다. 제제에게 뽀르뚜까는 일종의 ‘키다리 아저씨’다. 그는 포르투갈인 마누엘 발라디리스다. 제제는 이 아저씨의 차에 매달렸다가 혼쭐이 난다. 자존심이 상한 제제는 원한을 품는다. “언젠가는 죽여버릴 거야”라고. 하지만 제제는 발을 다친 것을 계기로 아저씨와 가까워진다. 아저씨는 제제의 동심을 가장 잘 이해하는 어른이 된다. 제제와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맛난 것도 챙겨준다. 그가 사고로 죽기까지 그는 가난한 제제의 아빠를 자처한다.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때는 1920년대다. 다섯 살 제제의 집은 가난하다. 아빠는 실직 상태여서 엄마가 공장을 다니며 가족의 생계를 대신 유지하고 있다. 장난꾸러기 꼬마 악동 제재는 하도 말썽을 많이 피워 아빠에게 매 맞는 일이 빈번하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철부지, 말썽꾸러기, 심지어는 악마라고까지 불리지만 제제는 그런 말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행동들은 단지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일 뿐이었다. 집안 형편상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제제네 식구들. 누나들과 형이 멋진 나무들을 먼저 차지하자, 어린 제제에게 남은 건 뒤뜰의 볼품없는 나무들뿐이었다. 제제는 할 수 없이 한쪽에 자리 잡은 어리고 조그만 라임오렌지 나무 한 그루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뭇가지에 올라타 앉은 제제에게 라임오렌지 나무가 말을 건다. 나무는 제제하고만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런 나무에게 제제는 ‘밍기뉴’라고 이름을 지어 준다. 그렇게 둘은 어떤 일이든 터놓고 얘기하는 가장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제제는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특별한 선물을 받지 못한다. 무료로 나눠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 동생과 함께 카지노에 가지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온다. 어린 제제는 너무 슬펐다. 집에 돌아와 ‘가난뱅이 아빠는 싫어’라고 소리치기까지 하자, 그 소리를 들은 아빠는 말없이 집을 나간다. 그 모습을 본 제제는 그동안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은 돈으로 담배를 사 아빠에게 선물을 주며 용서를 빈다. 한편 제제는 다친 발을 치료해준 이웃의 ‘뽀루뚜가’아저씨와 친해지면서, 서로 마음을 열고 어떤 비밀이라도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 제제는 아빠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거리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지만, 그 노래는 야한 가사의 성인 노래였다. 아빠는 너무 화가나 제제에 손찌검한다. 큰 상처를 받은 제제는 뽀루뚜가 아저씨에게 자신을 아들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아저씨는 제제를 가족들로부터 빼앗아 올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뽀루뚜가 아저씨는 운전 중 기차와 충돌하여 죽음을 맞는다. 너무나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에 충격을 받은 제제는 심하게 앓기까지 한다. 며칠간 계속된 가족들의 지극한 간호 덕분에 제제의 몸 상태는 점점 회복하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제제는 내적으로 성장한 자신을 발견한다. 아빠의 취직이 결정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제제는 밍기뉴와 헤어질 준비를 한다.

문득 소설 줄거리를 생각하며 어린 제제의 마음속 “작은 새”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작은 새는 제제가 소리 내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으리라. 소설에 따르면 작은 새는 어린이들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하느님이 만든 거다. 어린애가 자라서 작은 새가 필요 없게 되면 그 새를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 하느님께서는 그 새를 영리한 다른 아이의 마음속에 넣는다. 어릴 때는 스스로 일어나는 힘을 기를 때까지 누군가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제가 밍기뉴와 친해진 후 작은 새를 놓아주는 장면이 무척 좋다. 제제가 이렇게 말한다.

‘작은 새야, 날아라. 높이 날아라. 훨훨 날아가 하느님의 손끝에 앉으렴. 하느님은 널 다른 애에게 보내주실 거야.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나를 위해 그랬듯이 그 애를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거야. 잘 가거라. 내 예쁜 작은 새야!’제제가 직장을 잃어 풀이 죽은 아빠를 기쁘게 하려고 동네 형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아직 어린 제제는 <나는 벌거벗은 몸이 좋아>라는 그 노래가 어떤 내용인지 잘 알지 못한다. 아빠는 제제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허리띠로 죽어라 때린다. 소통이 부족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목에서 제제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이 만연한 빈곤국가의 장래가 더 걱정이다. 아동 폭력을 포함한 가정폭력은 소득과 관계없이 다양한 계층에서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저소득층에서 왜 더 빈번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분노나 홧김에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그 밑바탕에는 사회적 양극화, 소득 불균형과 같은 경제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뜻도 모르고 부른 대중가요 가사 하나 때문에 가차 없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모습은 국민과의 소통보다 가혹한 검열과 탄압으로 일관한 개발도상국가의 국가 모습이다. 국가 부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대한민국에도 유기 아동이 상당하다. 버림받았다는 상처는 아동 발달 지연, 불안, 우울 같은 정서나 행동에 있어서 문제로 나타날 수 있다.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 지원 확대도 필요하다. 전 세계 거리에 떠도는 아이들의 40%가 중남미에 있다는 국제연합(UN) 통계를 보며 슬픈 제제의 자화상을 생각해 본다.
소설이 나온 그해 크리스마스는 절대 잊지를 못할 일이 벌어진다. 인류가 달나라에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월남전, 쿠바사태 등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크리스마스 이브, 온 세상 사람들은 TV,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인류가 사상 최초로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달 궤도 진입에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달에 도착한 아폴로 8호 승무원들의 메시지를 보자. 창세기 1장 1절부터 11절이었다. 그들은 왜 하느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제제는 왜 예수님을 미워하고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지 생각해 본다. 제제의 형이 제제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 생각엔 아기 예수는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만 태어났다고 생각해. 조금 자란 소년 예수는 부자들만을 소용 있는 사람들로 보았던 거야. 제제, 이제 이런 말은 그만해 두자. 이런 말을 하면 죄가 된대.’

가슴 아픈 얘기다. 깊어 가는 크리스마스 밤에 교회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진다. 밤하늘을 꽃으로 수놓는 폭죽으로 성탄을 축복하는 이웃들에게는 행복한 밤이었지만 제제네 식구들에겐 가장 슬펐던 그날 밤을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설에서 제제는 세실리아 선생님의 꽃병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장미꽃을 꺾어 온다. 이를 안 세실리아 선생님이 제제를 불러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 하자 제제가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꽃들도 하느님의 것이잖아요. 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 집에는 정원이 없어요. 또 꽃을 사려면 돈도 필요하고요. 저는 선생님의 화병만 늘 비어 있는 게 가슴이 아팠어요. 선생님께선 가끔 제게 과자를 사 먹으라고 돈을 주셨잖아요?”

“제제, 난 너에게 매일 조금씩 주려고 했지만 네가 그냥 가버리곤 했어.”
“매일 선생님께 돈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건 왜?”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애가 또 있어요.”

세실리아 선생님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아이에게 마음을 쓰는 다섯 살 제제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제제에게 비어 있는 꽃병을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황금 같은 마음을 가진 제제에게 조그만 꿈을 주는 대신 자신은 제제로부터 가장 크고 훌륭한 감동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제제 속 ‘악마’가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게 되면 사회적 일탈로 이어질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헤크먼은 재소자에게 흔히 발견되는 폭력을 유발하는 MAOA 유전자(폭력유전자)를 두고 실험한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MAOA 유전자를 지닌 폭력적인 아이가 중산층 가정에서 제대로 양육을 받은 경우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MAOA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폭력에 많이 노출된 환경에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경우에는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MAOA 유전자가 적은 아이들은 학대를 받아도 일반인의 예상과 달리 범죄자가 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결국 인성은 절반 정도가 유전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교육으로 충분히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헤크먼은 만 3~4세부터 조기 인성교육을 충분히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외된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희소성’이 아니라 ‘모성의 빈자리’라는 말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돈으로 자식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에 대한 경고장으로 느껴진다. 헤크먼은 조기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로 범죄율을 낮추는 데 드는 비용이 경찰관 수를 늘리는 것의 5분의 1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가난한 자에 대한 투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봤다. 국가가 아이들 교육에 투자해서 얻는 이익은 빈곤층뿐 아니라 세금을 내는 중산층과 부유층을 포함해 모든 사회가 광범위하게 공유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름을 딴 ‘헤크먼 방정식’은 오바마 대통령 연설의 기초 이론이 된다. ‘투자(Invest)+개발(Develop)+유지(Sustain)=이득(Gain)’이 그의 방정식 이론이다.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동등한 학습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학습권을 보장하도록 국가가 ‘재원을 투자하라’고 헤크먼은 외친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작은 새, 뽀루뚜가와 헤크먼 방정식은 아이에 대한 인성교육이 얼마나 큰 사회적 자산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