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모글로빈의 시인’ 쿠엔틴 타란티노에 앞서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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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딥 레드>(1978)라는 작품이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다코타 존슨과 틸다 스윈튼을 캐스팅하여 리메이크한 <서스페리아>(2019)의 원작 영화 <서스페리아 1977>(1977)를 만든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영화다. <딥 레드>는 일본 개봉 당시 <서스페리아 2>로 소개되며 국내에서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후자의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두 영화는 다리오 아르젠토가 만들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상관관계가 전혀 없고 심지어 <딥 레드>가 <서스페리아 1977>에 앞서 발표됐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딥 레드'는
어떻게 '서스페리아 2'로 알려졌나
다리오 아르젠토의 대표작으로는 <서스페리아 1977>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딥 레드>도 그에 못지않은 완성도로 팬들에게 주목받았다. 심지어 미국 영화 정보 사이트 IMDB의 평점에 따르면 7.5를 받은 <딥 레드>가 7.3의 <서스페리아 1977>보다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성공적인 연출 데뷔를 이끈 <수정 깃털의 새>(1970)가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급부상한 ‘지알로’ 공포영화의 자장 안에서 평가받았다면 <딥 레드>는 다리오 아르젠토만의 공포 문법을 완성해 그 개성적인 스타일이 <서스페리아 1977>로 이어진 까닭이다. 노란색 표지의 장르 소설을 의미하는 지알로는 빨강, 검정 등과 같은 원색을 강조하는 이미지로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장르명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다리오 아르젠토는 <딥 레드>에서 살인자가 상대를 살해하는 독창적인 방법과 그 순간의 아드레날린 - 실제라면 비윤리적인 표현이지만, 공포영화가 오락물로서 어필할 때 관객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의 정체 - 을 최고조로 이끄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고블린’의 음악이 어우러져 다리오 아르젠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1966)에서 사진작가로 출연했던 데이빗 헤밍스는 <딥 레드>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마크로 출연한다. 친구와 만나 술 한잔을 하던 중 검은 코트를 입고 검은 장갑을 낀 이가 금발 여성을 살해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모른척했으면 살해 협박을 받지 않았으련만 마크는 신문기자 지나(다리아 니콜로디)와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려 수사에 나선다. 다시 살해 현장을 찾은 마크는 당시 목격했던 그림이 사라진 사실을 깨닫고 이를 단서 삼아 비밀을 풀어가던 중 살인마가 지인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한다.지알로의 특징 중 하나는 공포물로 분류되면서 탐정물 혹은 수사물의 형태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건데 다르오 아르젠토 영화의 경우, 두 장르가 결합한 서사의 고리는 비약과 비논리가 아무렇지 않은 듯 헐겁게 조여져 있다. 수사물 혹은 탐정물의 구조는 이야기 전개를 위한 어시스트의 도구일 뿐 서사의 빈틈을 메우는 건 도대체 어떻게 상상했을까 감탄하게 되는 살인 묘사와 마크 위주로 장면이 전개되는 중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살인자와 관련한 짧은 장면이 칼로 찌르듯 무참하게 끼어드는 편집의 절묘한 리듬감이다. ‘진한 빨강 deep red’, 그러니까 노골적인 피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제목처럼 <딥 레드>의 마지막 장면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낀 목걸이 때문에 모가지가 잘려 나간 살인자의 피 우물 위로 비추는 마크의 얼굴에 할애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연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1992)을 발표했을 때 영화 전반에 낭자한 피의 묘사를 보고 혹자는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원조를 꼽으라면 단연 다리오 아르젠토이고 언급한 엘리베이터 씬은 그 진가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마크가 살인자의 정체를 파악해 가는 과정에서 단서가 될 만한 설정들이 종종 등장한다. 가령, 욕실에서 살해당한 또 한 명의 희생자는 벽에 단서를 남겨 놓고 숨을 거둔다. 보통의 수사물이면 이를 바탕으로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쫓지만, 다리오 아르젠토는 온수를 틀어 욕실 곳곳에 김이 서리고 그럼으로써 드러나는 문구의 내용이 아니라 그 과정의 기발한 묘사에만 신경을 쓴다. 흠을 잡으려 해도 의미가 없는 게 감독이 ‘신경 쓰지 않는’ 서사의 허술함을 매울 정도로 ‘신경 쓰는’ 원색의 살인 시퀀스가 관객을 현혹해서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모든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 서사의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피리아>의 경우처럼 리메이크로 이뤄지기도 한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는 마녀의 본산인 발레 학교에 입학해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는 탈출하는 학생의 사례를 다뤘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원작 영화가 1970년대 독일 배경이라는 것에 착안해 동서로 갈라진 베를린을 중심에 두고 혼란한 사회상과 희생자로만 등장하는 공포물에서 여성의 지위를 역전시키는 설정으로 원작 영화에서 발견한 빈틈의 여지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메운다. 무엇이 낫다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영화 유산의 측면에서 감독의 세계는 어떻게 창조되고 어떤 방식으로 계승되어 역사로 발전하려는지를 논하고 싶을 뿐이다. 다리오 아르젠토도 마리오 바바가 창조한 지알로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지알로를 완성하였고 이는 루카 구아다니노뿐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대가, 그리고 다리오 아르젠토의 지알로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말리그넌트>(2021)의 제임스 완과 같은 할리우드의 젊은 재능까지, 폭넓게 퍼져있다. 다리오 아르젠토는 공포영화의 새로운 문법을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 역사까지 새로 썼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