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돌아온 사람을 욕하는 세상…거짓 영웅담으로 마음껏 비꼬다

여기, 피화당

병자호란 '환향녀'를 보듬는 작품
‘박씨전’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신 승리’ 소설이다. 박씨 부인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청나라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다. 언제 쓰였는지, 누가 썼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사진)은 박씨전을 쓴 작가를 상상한다.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지만,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여성들이다.가문의 명예라는 명분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한 세 여인 가은비와 매화, 계화는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 동굴을 ‘피화당’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에서 쓴 애정 소설을 팔아 하루하루를 버틴다.

세 여인에게 소설은 생존 수단에서 정신 승리의 수단으로 바뀐다. 사대부를 풍자하는 글을 써달라는 양반 후량의 부탁으로 ‘박씨전’을 쓰기 시작하면서다. 후량이 그들에게 글을 부탁하며 하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비꼬아주시오!”

박씨전에 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녹여냈다. 박씨 부인은 못생기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가족과 나라로부터 버려진 주인공들처럼 피화당으로 쫓겨난다.이야기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붓에는 분노가 담긴다. 추한 허물이 벗겨지며 아름다운 여인으로 거듭난 박씨 부인은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단숨에 청나라 군대를 무찌른다. 힘없이 버림받은 주인공들과 달리 박씨 부인은 스스로 불합리함과 차별을 깨부순다.

개연성도 현실성도 전혀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들이 의지할 곳이라곤 말도 안 되는 영웅담뿐이다. ‘환향녀’라는 낙인이 사라지지 않아 가족이나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그 이야기로 용기를 얻고 희망을 찾는다.

박씨전과 세 여인의 이야기를 연결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세 여인이 박씨전을 써 내려가며 몸소 장면을 재현해 하나의 전통극이 펼쳐진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박씨 부인과 겹치며 그들의 분노와 억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국악이 등장인물의 ‘한’의 정서를 극대화한다.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음악이 한에 서린 등장인물들의 절규에 애처로움을 더한다.뼈아픈 역사에 담긴 사회의 모순과 여성에 대한 핍박을 이야기해 강한 여운이 남는다. 우리 고유의 소리를 기반해 만든 음악도 신선하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오는 4월 14일까지 열린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