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설비투자금 헐어 나눠주라는 행동주의 펀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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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60조 환원" 주장“행동주의 펀드 때문에 비상입니다.”
"장기 성장성 훼손" 우려 커져
김익환 증권부 기자
정기 주주총회를 앞둔 요즘 주말에 출근한다는 대기업 임원이 적지 않다. 돌출 변수에 대비하기 위한 임원 회의가 주로 주말에 열리면서다. 이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안건은 행동주의 펀드다. 올 들어 이들의 요구 강도가 전례 없이 세졌기 때문이다.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 5곳이 연합해 삼성물산에 자사주 소각과 배당 증액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이다. 행동주의 펀드를 운용하는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은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와 손잡고 금호석유화학에 주주제안을 내놨다.행동주의 펀드는 주주환원을 촉진하는 정부 정책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에 편승해 한층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영계에선 이들의 요구 수준이 도를 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5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주장이 그렇다. 거버넌스포럼은 2019년 국내 행동주의 펀드와 기관투자가가 주축이 돼 출범한 민간단체로, 기업 지배구조 개선 논의를 위해 결성됐다. 이들은 삼성전자(주주환원 규모 50조원), 현대자동차(8조원), LG화학(2조원)이 총 60조원 규모의 ‘주주환원책 카드’를 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만큼의 주주환원을 한다면 주가가 50~120% 뛸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재계는 물론 투자은행(IB) 전문가들도 “기업의 미래 성장은 안중에도 없는 소리”라며 반박하고 있다.
삼성전자 사례만 봐도 명백하다. 이 회사의 지난해 3분기 말 현금성 자산(단기금융자산 등)은 92조원 정도 된다. 언뜻 보면 넉넉해 보인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인 반도체는 업황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업황이 나빠지면 수십조원씩 적자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백조원을 들여 구축한 설비와 관련한 고정비용도 상당하다. 여기에 매년 50조원 안팎의 설비투자를 진행해야만 겨우 시장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메모리 시장 환경과 설비투자를 대비하려면 이 정도의 ‘현금 안전판’은 구축해둬야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데도 50조원어치 주주친화책을 쓰라는 주장은 삼성전자의 성장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한국 기업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 주주친화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업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일방적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감안해야 한다는 평가가 많다. 기업들의 장기 성장을 유도하는 대신 일시적인 주가 부양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돼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