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클래식 여행]英바비칸센터 2천 관객, 런던 심포니 앞에서 숨도 못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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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바비칸 센터, 1982년 문 열어영국 바비칸 센터는 ‘유럽 최대 복합예술문화센터’로 불리는 런던의 명소다. 외관부터 남다르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와 설비, 노출된 콘크리트 탓에 보는 순간 ‘어딘가 음산하고 거칠다’란 인상을 남긴다. 1950~1970년대 영국 건축계에서 유행한 ‘브루탈리즘(Brutalism)’ 양식으로 만들어진 영향이다. 브루탈리즘이란 우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서구 건축에 반해 다소 야수적인 건축을 지향하는 사조를 뜻한다.
2차 세계대전 폭격 지역…도시 개발
런던 심포니 상주 공연장으로 유명
'스튀츠망 지휘-런던 심포니 공연' 리뷰
팽팽한 긴장감, 광활한 에너지 뿜어내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서사 완벽히 표현
한때 ‘흉물’ 취급받던 골칫덩이…이젠 문화 예술 ‘명소’로
2차 세계대전 때 가장 폭격이 심했던 지역에서 도시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계된 바비칸 센터는 10여 년의 공사를 거쳐 1982년 문을 열었다. 설계에는 건축가 체임벌린, 파월, 본이 참여했다. 독특한 외형 탓에 한때 BBC가 선정한 ‘가장 흉물스러운 건물 1위’로 뽑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을 꼽을 때 늘 빠지지 않는다. 2001년엔 문화부로부터 2급 보존 건물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영국 런던의 금융 중심가에 자리한 바비칸 센터에선 클래식 공연은 물론 전시,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2000석 규모의 바비칸 메인 홀과 1150석 규모의 바비칸 극장 앞은 언제나 공연을 기다리는 가족 단위의 인파로 북적이고, 2층에 대규모로 설계된 공공 도서관은 원하는 책과 음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들끓는다. 이 도서관은 200만 개 이상의 클래식 음악 트랙과 3000개 이상의 클래식 음악 공연 비디오를 제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리 크래스너 등 세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아트 갤러리는 3층에 자리하고 있다. 바비칸 센터엔 1500종 이상의 식물을 기르고 있는 온실도 있는데, 여기선 조각가들이 설치한 예술품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야외 테라스에선 투박한 질감의 센터 외관과 녹색 빛깔의 신비로운 분수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바비칸 센터는 세계적인 명문 악단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으로 더 유명하다. 런던 심포니는 주로 바비칸 홀에서 공연을 여는데,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이 아닌 만큼 음향적으로는 아쉽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래된 음향 문제 때문에 거장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런던 심포니 음악감독 재임 시절 런던시에 새로운 공연장 설립을 강하게 요구했단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런던시가 2억8800만파운드(약 4860억 원)를 들여 새 공연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지만, 비용 등의 문제로 결국 무산됐다. 바비칸 센터가 런던 심포니에겐 애증의 공간인 셈이다.
마에스트라 스튀츠망이 이끈 ‘런던 심포니’…브루크너의 세계를 꺼내다
“정말 경악할 만한 연주예요.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요. 안 그런가요?” 지난 8일 저녁(현지시간) 영국 런던 바비칸 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 위에 손을 올린 채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치던 한 60대 신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기자를 향해 건넨 말이다.분명 그 신사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2000명 규모의 청중은 이제야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겠다는 듯 큰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시작된 뜨거운 환호성은 지휘자가 세 번이나 커튼콜에 나선 뒤에도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그럴 만한 연주였다. 건조하면서도 답답한 음향으로 악명 높은 바비칸 홀을 뚫고 나오는 런던 심포니의 강렬한 음색과 응축된 소리의 움직임은 듣는 내내 온몸이 동아줄로 꽁꽁 묶였다 느껴질 정도로 아찔했다.이날 공연은 출연진부터 범상치 않았다. 현재 여성 지휘자로는 유일하게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의 수장을 맡는 마에스트라 나탈리 스튀츠망(애틀랜타 심포니 예술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세계 최고 권위의 클래식 음반상인 그라모폰상을 무려 7차례나 거머쥔 노르웨이 출신의 피아노 거장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가 협연자로 무대에 올랐다. 이들이 함께 들려준 작품은 모차르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2번’. 안스네스의 연주는 잠시도 눈과 귀를 뗄 수 없을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유려한 손 움직임과 명료하면서도 맑은 음색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선율을 조형하면서도 셈여림과 리듬의 변화, 색채 대비의 순간은 모두 살려냈다.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 음역에 따라 색채까지 바꿔가면서 풍부한 양감을 만들어내는 실력은 일품이었다. 3악장에선 세부의 기교적 악구들을 완전히 장악하면서도 긴 호흡은 놓치는 법이 없었고, 과장된 표현, 성급한 손놀림은 그의 정교한 연주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 덕에 모차르트가 악보에 써낸 음악적 언어, 견고한 구조, 짜임새는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카덴차에서는 그야말로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다.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싱그러운 터치와 꿈결처럼 감미로운 색채, 음의 파장을 넓게 펼치면서 공연장 전체를 울리다가도 돌연 소리 진동을 줄여 극도의 박진감을 만들어내는 노련함까지. 세게 건반을 내려치거나 급하게 속도를 내면서 만들어내는 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충분히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다는 걸 보여준 연주였다. 런던 심포니는 마치 안스네스의 호흡을 이미 체화했다는 듯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연주 완성도를 높였다. 피아노 선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세부적인 리듬 변화와 강세의 이동을 탁월하게 전달하면서 음향적 조화를 이뤄냈고, 독주가 사라질 때는 셈여림의 폭을 단숨에 키우면서 추동력을 잃지 않는 역동적인 모차르트를 들려줬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2부에서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이었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브루크너를 기리기 위해 올린 이 작품은 그에게 처음으로 성공을 안겨준 각별한 작품이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1악장 초입은 차분하게 출발해 서서히 해가 떠오르듯 악상을 펼쳐내면서 극적인 발전을 이루는 게 백미인데, 스튀츠망이 이끄는 런던 심포니는 작품의 역동적 변화를 더없이 완벽하게 들려줬다. 스산하면서도 차분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현의 통일된 트레몰로(한 음을 빠르게 되풀이하는 연주) 위로 덧입혀지는 호른과 첼로의 단단한 울림, 선율에 새로운 성부가 하나씩 더해지는 순간마다 강해지는 응집력, 모든 악기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광활한 에너지는 마치 거대한 음(音)의 홍수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한 짜릿한 경험을 선사했다. ‘관현악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도입부’의 진가를 드러내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명연이었다. 소문대로 스튀츠망은 악단을 완전히 장악할 줄 아는 지휘자였다. 브루크너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사운드를 충분히 살려내면서도 셈여림, 색채, 표현 대비는 귀신같이 짚어냈다. 각 악기의 배음, 잔향을 정교하게 조율하면서 소리의 명도까지 변화시키는 그의 지휘엔 빈틈이 없었다. 오케스트라는 내내 대단한 집중력을 쏟아내면서 음향적 균형감과 선율의 생동감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스튀츠망과 런던 심포니는 그저 각 음역만 채워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작품을 완전히 꿰고 있을 때만 낼 수 있는 입체적이면서도 기승전결이 분명한 연주를 들려줬다. 60대 때 이 작품으로 처음 빛을 보게 된 한 음악가의 지난한 인생을 그려내듯, 선명하면서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선율과 긴 호흡은 끊임없이 악상의 변화와 고조를 끌어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2악장에선 무게감 있는 바그너 튜바의 울림과 따스한 비올라 선율을 중심으로 종교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악상을 생생히 펼쳐냈다. 굉장한 밀도를 유지하다가 심벌즈, 트라이앵글의 등장을 기점으로 분위기 전환을 이뤄내는 순간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만큼 훌륭했다. 마지막 4악장. 런던 심포니는 마치 잘 세공된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소리에 긴밀하게 반응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밀려 쏟아지듯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거대한 음향, 생동감 넘치는 리듬 표현, 폭넓은 다이내믹, 장대한 에너지로 마지막 한 음까지 빈틈없이 몰아붙이는 결말은 브루크너가 그린 ‘환희의 세계’ 그 자체였다. 한스 리히터,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 등 세계적인 명장의 손을 거친 120년 전통의 오케스트라 연주는 여러모로 달랐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보다 더 정확히 이들의 연주를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런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