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왼손과 화려한 오른손의 조화…임윤찬의 쇼팽은 지극히 쇼팽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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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임윤찬 카네기홀 리사이틀2022년 여름 미국 텍사스에서 열리는 라운드 탑(Round Top) 페스티벌에서 트럼페터 카일 셀먼(Kyle Sherman)과 함께 연주했던 적이 있다. 카일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주관 오케스트라였던 포트워스 심포니의 수석 트럼펫 주자였다. 그는 당시 많은 동료 단원이 ‘임윤찬이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임윤찬에 관해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당시 17세 소년의 연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조가 단단하고, 내부 선율을 유려하게 구사하는 연주자를 본 적이 없을만큼 인상적이었다는 말이었다.
쇼팽이 작곡한 27개의 연습곡
테크닉과 음악성 '완벽한 조화'
"판타스틱" 기립 박수 쏟아져
임윤찬은 21일(현지시간) 뉴욕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에서 쇼팽의 연습곡으로만 프로그램을 정했다. 4월 음반 발매와 맞물린 선곡이었다. 19세 청년이 그리는 쇼팽의 시적 감성은 어떤 모습일까. 쇼팽은 테크닉이 음악보다 앞서나가거나, 음악 때문에 테크닉이 보이지 않는 불균형이 생기기 쉽다. 임윤찬의 섬세함이나 세련된 기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혹 경계를 넘어가거나, 반대로 선이 모호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윤찬의 쇼팽은 지극히 쇼팽다웠다. ‘12개의 연습곡, Op. 10’과 ‘Op. 25’는 쇼팽의 피아니즘의 정점에 놓여있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전반부에 연주된 Op. 10은 작품 곳곳에 함정이 놓여 있는 곡이다. 투박하고 각진 왼손을 돕는 화려한 오른손의 인상적인 대비가 조화로웠던 첫 곡을 지나, 가장 유명한 3번 곡에 이르자 그는 화면을 흑백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강폭을 넓혀 유속을 늦춘 후 여유 있는 슬픔을 덤덤하게 그려냈다. 4번과 5번처럼 속주가 등장하는 순간에는 여지없이 달렸다. 눈앞에서 금세 사라져 버리는 자동차 경주장이 아닌, 마치 장난감 경주 트랙을 보듯 모든 흐름이 내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지는 긴장감이 일품이었다. 8번에서는 모자이크처럼 빼곡히 박힌 작은 음들의 조합이 별처럼 빛났다.
후반부에 연주된 Op. 25는 조금 더 극적인 장치들이 느껴졌다. 빠른 곡들을 한 번에 연결해서 소화하고, 특히 10번부터 마지막 12번까지 성격이 다른 곡과 곡들 사이의 연결도 절묘했다. 때로는 건조한 목소리로, 때로는 공중에 흩뿌려져 천천히 내려오는 음들의 속살을 보여주는 마법을 구사했다. 정신없이 엉켜있는 실타래는 구조의 정확한 이해로 풀어낼 수 있듯이, 그는 각 조직의 내면을 속속들이 탐구해 답안을 제시했다. 완벽한 기교가 테크닉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그가 쌓아 올린 노력은 어디까지였을까.공연은 매진이었다. 당일 취소된 티켓을 구하기 위해 아침부터 1시간 반동안 기다렸다가 결국 돌아간 관객을 만났다. 뉴욕은 물론, 시애틀, 보스턴, 달라스에서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10대에 카네기홀 리사이틀 데뷔라는 역사적인 연주를 보기 위해 뉴욕까지 날아온 한국 팬들도 많았다. 지난 주말, 임윤찬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데뷔 연주에 참석했던 뉴잉글랜드 음악원 백혜선 교수는 그가 “2년 전 반클라이번 대회 때와는 전혀 다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말했다. 손민수 교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는 백교수는 “임윤찬의 연주에 선생님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이제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마지막 곡까지 연주된 후 커튼콜이 이어졌다. 10여 차례 무대를 오가던 그는 네 곡의 쇼팽의 작품으로 앙코르를 연주하며 뉴욕 청중의 뜨거운 환호에 답했다. 임윤찬은 내년 2024~25 시즌에 두 차례에 걸쳐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갖는다. 2025년 3월 6일에는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4월 25일에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으로 바흐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선보일 예정이다.
김동민 음악칼럼니스트(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