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희보춘신(喜報春信)-필히 ‘봄’이 올 것을 기다리는 마음

[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
매년 섣달이 오면, 준비해 두었던 새 달력을 펴고 꽃 필 시기를 센다. 음력 12월, 아직은 춥고 잔설이 분분한데 어디 꽃이 피었겠나. 봄이 오기도 전부터 설레발치는 이른 마음을 염려하는 이들은 섣부르다 책망할 것이다. 입춘이 왔다 한들, 엄동설한(嚴冬雪寒) 물러설 것 같지 않고, 북풍한설(北風寒雪) 멈출 기미 없을 것 같지만, 극월(極月) 추운 날씨에도 땅(土)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음기를 비우고 양기를 채워 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힘은 양기를 얼은 꽃나무 가지 끝까지 밀어 올린다. 결국에는 고운 꽃망울을 띄운다. 그것이 매화(梅花)다.

매화는 어떤 다른 식물보다 빨리 초봄을 맞이한다. 꽃부터 피어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매화는 크게 백매화와 홍매화로 나뉜다. 백매화는 청고(淸高)하다. 발그레 달아오른 분홍빛 뺨에 여린 어깨선을 수줍게 드러낸 어린 소녀가 떠오른다. 그에 비해 붉은 매화는 화사하고 화려한 자태다. 옛 문인들의 수작을 보면, 여인의 신비로움을 떠올리는 봉접(蜂蝶)의 희롱(戲弄)은 비껴두고 매화에서 절대 굴하지 않는 기개(氣槪)를, 지조와 덕, 세속 밖의 가인(佳人), 인고 수절하는 의인 등을 더 간절히 보고자 했던 것 같다.
이지숙_부귀영화-백매_71X50X5cm_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_2022
지난 세월 많은 문인들이 꽃을 주제로 창작한 시와 그림 중에 매화가 소재인 작품이 가장 많다. 북송(北宋)의 시인 임포(林逋, 967∼1028) 덕택이다. 중국 서호의 고산(孤山)에 들어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 삼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임포의 일화는 후세 문인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임포가 지은 시를 시와 그림으로 재차 인용해 창작하며, 그의 시적 세계에 자신의 처지와 바램을 견주어 공유하고 즐기는 것을 취미, 위로, 교양으로 여겼다. 이렇듯 매화가 사군자 중 대나무, 소나무, 국화와 견주어 유독 고매함의 대명사, 서정적 순간에 어울리는 단골 화제(畫題)가 된 것은 매화 특유의 외관과 은은한 향기 덕분이다. 단단하게 생긴 늙은 줄기, 차갑게 말라서 거친 가지 끝에 두어 개 짝을 지어 조촐하게 핀 꽃이 뭐 그리 대단한 향을 내뿜을까 싶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어느 고급 향수와도 견주어 뒤떨어지지 않은 고매한 향기가 난다. 고운 자태, 맑은 향기에 취하면 서 있는 곳이 화현(化現)과 다름없다.

매화는 같이 동원되는 소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달과 풍설(風雪)이 있는 그림의 이름은 월매도(月梅圖)다. 달과 매화는 음과 양의 오묘한 조화를 상징한다. 떠오르는 달과 고요함에 둘러쌓은 매화는 동과 정의 기색(氣色)의 상징이다. 아직 한기 서린 섣달에 핀 납매(臘梅)나 설매(雪梅)는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을 알리는 전령이자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 썩은 듯한 고목에서도 때가 되면 자연은 싹을 피우고 봄의 등불을 킨다는 자연의 이치를 선인들은 문간 대문에 써 붙인 춘련(春聯)의 구절에서, 벽에 걸어둔 납매화(臘梅畵), 설매화(雪梅畵)에서 보았다.
어몽룡, 월매도, 17세기, 비단의 수북, 119453cm, 국립중앙박물관
옛 사람들은 매화를 공예품으로도 즐겼다. 매화는 조선백자, 나전칠기, 목가구 등 많은 공예품에 주 무늬와 보조 무늬로도 변격한다. 특히 여인들의 비녀, 댕기, 저고리 금박, 베개나 이불 등 규방공예에 매화무늬는 모란과 더불어 단골이다. 매화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조선 선비들의 복식·장신구, 문방구에도 매화가 자주 등장한다. 용모단정 의관정제(容貌端正 衣冠整齊)의 엄중 속에서 선비들은 매화로 나름 자기만의 멋, 취향, 신조를 드러냈다.
청화백자매화문와장식사각연적, 국립중앙박물관
나전 칠 국화·모란 넝쿨 매화 대나무 무늬 상자
요즘 공예품에도 매화는 익숙하다. 요즘에는 전통을 일상용품으로, 굿즈로 즐기는 경우가 많아 용(龍), 달항아리, 반가사유상 등과 함께 매화가 자주 문양으로 등장하며, 현대 공예가들의 창작으로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 중 도예가 이지숙의 매화는 고전 월매(月梅), 설매(雪梅), 납매(臘梅)를 공예 조형으로 가시화한다. 우선적으로 흙을 반죽해 매화의 가지, 꽃을 빚고, 깎고, 굽는다. 그 후에 아크릴물감을 물과 섞어 얇게 색칠하기를 거듭해 원하는 질감, 색채를 만든다. 색칠한 조각을 사각의 캔버스 위에 배치하며 자연스러운 구도를 만드는 일이 이지숙의 ‘매화도’다. 이때, 동양 고미술의 전통적 이미지, 색채와 장식, 문양과 정취를 가져와 참조한다. 그러나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전통 안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는 정취와 의미를 빌려와 자신을 비롯한 현대인들의 삶을 반추한다.

작가는 몇 년간 작업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지난한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의 관심이 오랫동안 매진했던 민화-책가도(冊架圖,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였던 정물화)에서 설매(雪梅), 납매(臘梅)로 옮겨간 이유다. 부조를 끼운 액자가 아니라 건축물의 창문같다. 액자 너머에는 매화가 거친 바람에 눈마저 빗겨 내리는데 홀로 혹독함을 견디고 있다.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 여린 꽃송이, 꽃잎이 볼수록 애잔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풍설(風雪) 속 매화가 아니라, 작가가 자신을 반추한 초상, 삶의 여정 중 유독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누군가의 모습 같다. 인간의 삶, 그 속에서 바라는 것이 과거와 지금이 다를까? 달과 매화를, 거친 눈과 바람을 견디고 선 매화를 보며 속을 삭이고 희망을 되뇌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을 수많은 강호(江湖)의 마음을 요즘 공예의 수법과 표현으로 보고 있다. 여전히 날은 차고 아직 꽃들도 여물지 않아 시간만 굼뜬 그런 섣달 봄날이다.
이지숙, 찰나-설중매(刹那_雪中梅), 102×110×6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 채색, 2023, 작가소장
이지숙, 찰나-설중매(刹那_雪中梅), 63×120×6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 채색, 2023, 작가소장
이지숙, 찰나-밤매화(刹那_夜梅), 27×70×5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 채색, 2023, 작가소장
도판목록
1. 어몽룡(魚夢龍), 월매도(月梅圖), 17세기, 비단의 수묵, 119.4×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청화백자매화문와장식사각연적(靑畵白磁梅花文蛙裝飾四角硯滴), 조선,
7.3×9.9×10.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 나전칠국화·모란넝쿨매화대나무무늬상자(螺鈿漆菊牡丹唐草梅竹文
箱子), 조선 12세기, 9.8×31.3×3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 이지숙, 부귀영화-백매(富貴榮華_白梅), 71×50×5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2022, 작가소장
5. 이지숙, 찰나-설중매(刹那_雪中梅), 102×110×6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 채색, 2023, 작가소장
6. 이지숙, 찰나-밤매화(刹那_夜梅), 27×70×5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 채색, 2023, 작가소장
7. 이지숙, 찰나-설중매(刹那_雪中梅), 63×120×6cm,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 채색, 2023, 작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