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인가 미술인가...무한히 환생하는 AI 거북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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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쳉 개인전 '사우전드 라이브즈''상태: 지루함. 현재 목표: 장난감 공을 찾는다'
서울 청담동 글래드스톤서 4월 13일까지
인공지능(AI) 활용한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
무한히 죽고 부활하는 거북이의 삶
거북이 한 마리가 아파트 내부를 떠돌고 있다. 게임 속 세계 같은 이곳은 거북이 '사우전드'의 일상을 보여주는 인공지능(AI) 시뮬레이션이다. 사우전드는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고 진화한다. 따분한 기색이 가셨는지 이내 새로운 타깃을 찾아 나선다.'상태: 목마름. 현재 목표: 맑은 물'AI를 활용한 작업으로 인간 의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져온 미국 작가 이안 쳉(40)이 신작 '사우전드 라이브즈(2023~2024)'를 들고 돌아왔다. 2022년 리움미술관 개인전에서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소녀 챌리스의 이야기를 선보인 지 2년 만의 한국 전시다. 서울 청담동 글래드스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전작에서 조연처럼 짧게 등장했던 챌리스의 애완 거북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사우전드는 작가가 개발한 '뉴로-심볼릭' AI 모델에 의해 구동된다. 관람객이 화면 앞에 홀로 설 경우, 영상은 외부 관찰자의 존재를 인식해 시시각각 변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관객이 챌리스의 세계에 더 몰입할 수 있는 개인화된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저녁마다 어린 딸한테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매번 비슷한 플롯에 지루하다 하더라고요.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들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주변 사물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를 끊임없이 캐물었죠. 'AI 가상 세계'란 아이디어를 얻은 건 딸아이의 투정 덕분이에요. 하하."'미술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대담한 시도의 배경에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난 작가는 UC버클리에서 인지과학과 미술을 전공했다. 하루에 영화 5~6편을 몰아볼 정도로 영화광이었던 그는 곧장 특수효과 전문기업 '인더스트리얼 라이트&매직'에 들어갔다. '스타워즈', '트랜스포머' 등 할리우드 대표 공상과학(SF) 영화들의 컴퓨터그래픽을 담당한 그 회사다.
한편으론 영화의 장르적 한계에 아쉬움을 느꼈다. 일단 완성되면 결말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선택이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비디오 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유저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심즈' 시리즈에 특히 매료됐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비주얼아트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뉴욕을 거점으로 게임적 요소를 결합한 영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이번에 선보인 '사우전드 라이브즈'에도 정해진 결말이 없다. 보통 영상 작품은 상영 시간이 있지만, 사우전드는 무한히 죽고 살아난다. 작은 거북이의 눈에 온 세상 전부인 챌리스의 아파트 도처에는 위협이 도사린다. 생존을 위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이전 생애의 20% 기억을 안고 다시 태어난다.
아래층에 마련된 전시 공간에는 'BOB 이후의 삶: 챌리스 연구 경험'(2021~2022)이 상영된다. 인공지능 'BOB'이 10년간 챌리스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챌리스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구심에 휩싸이는 줄거리다. 이 역시 비디오 게임 엔진을 기반으로 구동된 시뮬레이션 세계다. 관람객은 스마트폰으로 '세계 관람' 모드를 가동해 인물의 성격과 주변 환경 등 세부 사항을 탐구할 수 있다.
심오한 세계관과 이색적인 전시 경험과는 별개로, 전시 공간은 다소 불친절하다. 50분을 웃도는 영상 길이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볼만한 의자가 부족하다. 작가가 구축한 방대한 가상 현실을 느긋이 즐기고자 방문한 관객은 당황할 수 있겠다. 전시는 4월 13일까지.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