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살 치매에도 창작 활동을 한 '추상 표현주의의 기수' 드 쿠닝

[arte]오범조 오경은의 그림으로 보는 의학코드
윌렘 드쿠닝과 치매
[도판1] 1961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윌렘 드 쿠닝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은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예술가로,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치의 힘찬 필치에 어두운 색감으로 그린 여성 그림들로 유명해졌다. [도판1] 1940년대와 50년대에 잭슨 폴록, 프란츠 클라인과 함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미국 지역주의(Regionalism)등 전통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추상적 형태, 작가의 감정이 깃든 강렬한 몸짓의 결과로써의 붓질을 예술의 주요 내역으로 삼는 추상표현주의 혹은 액션 페인팅을 이끌어낸 기수로, 그의 작업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비평가들의 해설 하에 모더니즘의 정수로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각인되었다.이 시기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여인 1>(1952)[도판2]를 꼽는다. 캔버스 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를 자유롭고 강렬한 붓질을 통해 다양한 색을 겹겹이 칠해 올려 추상적으로 패턴화된 여성의 모습을 직조한다. 또 다른 예시로는 <발굴(Excavation)>(1950) [도판 3]이 있는데 여기서 보이는 즉흥적인 붓의 운용은 작가의 신체가 얼마나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몰입했는지를 잘 드러낸다.
[도판2] 윌렘 드 쿠닝, &lt;여인 1(Woman, 1)&gt;, 1950-52, 캔버스에 유화, 192.7 x 147.3 cm,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소장, © The Willem de Kooning Foundation
<여인 1>(1952)
[도판3] 윌렘 드 쿠닝, &lt;발굴(Excavation)&gt;, 1950, 캔버스에 유화, 205.7 x 254 cm, 시카고예술원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 The Willem de Kooning Foundation
<발굴(Excavation)>(1950)그린버그는 드 쿠닝의 모더니스트로서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드 쿠닝은 (아르쉴) 고르키와 마찬가지로 화면 구성을 똑부러지지 않게끔 하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실력의 결과이다. 예술가가 기교에 천착하면 그것에 휩쓸려 미학적 만족을 놓치기 마련이지만 (드 쿠닝은) 감정이란 요소를 기술보다 중시하여 창의적인 자기 고유의 표현을 만들어낸다. 비정형성 혹은 모호성이라는 드 쿠닝 회화의 성격은 기교를 억제하려는 그의 부단한 노력에서 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교로 느껴지는 '작가의 의지'는 포기하는 한편 너무 또렷한 아이디어를 다루는 것 또한 거부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다른 맥락에서 상당한 의지의 행사, 그리고 의식의 제고를 필요로 하여, 예술가로 하여금 언제 자신이 진정 즉흥적으로 작업하는지와 기계적으로 그리는지 사이의 경계를 알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고충은 어느 화가에게나 있겠지만 나는 드 쿠닝의 경우처럼 그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1]

추상화의 열풍 속에서 모더니스트 이론가들은 좋은 추상 작품의 기준을 정신적, 감정적인 것에 두었다. 보이는 대상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제공하느냐를 기준으로 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전통적인 구상화와 달리 좋은 추상화란 작가가 품고 있는 감정을 이성의 개입을 최소화한 신체적 활동(즉흥적인 붓질)으로 매개해 화폭에 옮겨 담는 것이라는 모더니스트 평론가들의 주장이 대중을 매료시켰다.

언뜻 이 해설에는 모순이 존재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작품을 구성하고 채색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기존의 미술 훈련에서 쌓은 공식, 경험들을 배제하고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이때 이 축적된 경험에서 순수한 감정을 추출하는 능력을 모더니스트 작가에게서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 감정이 담긴 즉흥적인 붓질과 그저 몸에 배긴대로 기계적인 붓질을 하는 것 간의 차이를 고심했다는 드 쿠닝에 대한 평가는 당대 모더니스트 작가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그런데 드 쿠닝의 80년대 작품들은 앞서 본 작품들과 양식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무제>(1986)[도판4]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우선 색의 갯수가 3-4개정도로 줄어들고 여러 겹의 물감을 쌓아 올리는 대신 얇고 가벼운 바탕에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의 구불구불한 선들로 화면을 구성한다. 덕분에 1940·50년대의 무거운 화면과 달리 추상적 형태들이 빈 공간을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갖고 부유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만큼 격동하는 감정은 사그러들고 강렬하던 붓질은 훨씬 의식적으로 조율된 차분함을 보인다. 형태적으로는 더욱 완전한 추상의 형태를 갖추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작품은 비평가 및 예술 애호가 사이에서 작업의 성숙기로 보는 입장과 이전만 못한 작품으로 보는 입장의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판4] 윌렘 드 쿠닝, &lt;무제(Untitled)&gt;1986), 캔버스에 유화, 런던 스카르스테드 갤러리(Skarstedt Gallery) 출품작, © The Willem de Kooning Foundation
<무제>(1986)

드 쿠닝의 후기작업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논란을 가중시킨 것은 그가 인지적 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었다. 1970년대부터 종종 사람들 이름이나 최근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하는 일이 있었지만 농담이나 소소한 거짓말로 실수를 잘 덮었고 워낙 유머감각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터라 크게 표가 나지 않았었지만 1980년대가 되면 ‘증상’으로 보일만한 변화가 눈에 띄었던 것 같다.예술계에서는 드 쿠닝이 심한 치매로 인해 더 이상 아티스트로 활동이 가능치 않은 것 같다고 수근댔다. 그의 가족들이 어시스턴트들을 활용해 아무것도 모르는 드쿠닝 앞에 캔버스를 들이밀어 작품을 만들어내게 하는 ‘공장’을 차렸다는 말이 세간에 돌았다. 예전의 그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확신이 들 때까지 몇달이고 그림을 고치고 또 고쳤었지만 이제는 어시스턴트들이 보기에 적당히 완성되면 새 캔버스를 놓아준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드 쿠닝이 그림을 완성하는 시간이 훨씬 짧아져, 기존 작품이 완성에 1.5년이 걸린 반면 80년대 작업들은 몇 주내로 그릴 수 있었다는 점이 마치 그 소문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실제로 1981-86년의 기간동안 드 쿠닝은 총 254점의 작품을 완성할 만치 다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 시기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이 좋지 않자 이를 우려한 윌렘 드 쿠닝의 아내 일레인 드 쿠닝의 지휘 하에 윌렘 드 쿠닝이 고른 색 이외에도 오렌지, 보라 등의 색을 어시스턴트들이 조색해 아티스트에게 칠하도록 쥐어 주었다고 믿기도 한다. 물론 드 쿠닝의 가족들과 어시스턴트들은 이를 완강히 부정했다.

결국 드 쿠닝의 가족들은 그가 치매를 앓고 있음을 고백했다 드 쿠닝의 치매는 다양한 병인학적 원인을 가질 것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심각한 알콜중독이었고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을 방치하여 영양부족이 심각하였고 처방약을 오남용하는 일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죽상동맥경화증(arteriosclerosis), 코르사코프 증후군(Korsakoff‘s syndrome), 그리고 뭣보다 1989년에 확진 받은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알츠하이머병은 이상 단백질(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타우 단백질)이 뇌 속에 쌓이면서 뇌 신경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퇴행성 신경 질환이다. 여기서 퇴행성이란 정상적인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세포가 손상되어 점차 증세가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유발하는 가장 흔한 원인(전체의 50~60%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알츠하이머병이 진행되면 소위 말하는 치매 증상, 즉 기억 상실을 비롯하여 언어, 판단, 추론 등의 인지적 능력의 소실을 가져온다. 1980년대의 드 쿠닝은 최근의 사건은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고향인 로터담에서 미술학교를 다닌 것,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왔던 것, 뉴욕에 정착하기 위해 페인트공으로 일한 것 등의 과거는 상세히 기억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치매의 증상 증 순행성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물론 알츠하이머 등의 치매성 질환이 예술적 능력을 곧장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손과 눈의 협응은 오랜 기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되면서 환자의 추론능력 등이 현격히 손상되므로 고도의 인지능력을 요구하는 예술작업에 영향을 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다만 윌렘 드 쿠닝의 1980년대의 작품의 경향성이 손상된 인지의 결과라고만 보는 것, 그리고 작품의 질이 1940-50년대의 것보다 떨어진다고 쉽게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우선 1970년대 심각한 알콜 중독과 우울증 시기동안 작업을 거의 하지 못하던 것과 달리 1981년 초기부터 그가 일레인의 도움으로 술을 완전히 끊고 우울증 약도 더이상 먹지 않을 수 있으며 감정기복이나 무기력증을 극복할 정도로 정신건강을 회복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의 가족과 어시스턴트들은 예술계 가십 내용과 달리 1988년까지는 그의 인지적 문제가 작품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후 빠르게 알츠하이머로 인한 문제들이 심화되며 1989년부터는 더 이상 드 쿠닝이 작품을 할 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1981년에서 1987년까지의 작업들은 치매가 점점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 창작 방식을 바꿔가며 자신의 예술 내역을 발전시켜간 결과물들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1981년 다시 붓을 잡게 되며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과거 자기 작업 중 걸작이라 할 것들의 실물과 사진을 늘어놓고 그 작품들의 윤곽선을 새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고 한다. 우선 형태를 딴 후 진짜 작업이 시작되어 손을 자유롭게 움직여 몇시간이고 계속하여 형태를 단순화시켰다가 다시 재구성했다가를 반복하여 새로운 이미지가 나오도록 한 것이다.

앞서의 <발굴>과 <무제>를 비교하면 이런 작업 과정을 상상해보기 수월하다. 가로 세로 2미터가 넘는 큰 캔버스로 작업하는 드 쿠닝이기에 젊은 시절같은 신체적 노동의 강도를 유지할 수 없어 전동으로 움직이는 이젤을 특수 제작하여 편의에 따라 캔버스의 방향을 틀고 움직여가며 그림을 그렸다.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나타나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추상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사학자 T.J. 클라크(T.J. Clark)는 드 쿠닝의 이 시기 작품이 모더니스트적 시각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초기 작업, 성숙기 작업과 이 후기 작업이 유의미한 선형의 발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2] 즉 1940-50년대 작업의 윤곽선을 따 확대하고 단순화, 패턴화 한 뒤 기존의 강렬한 붓질을 지워나가는 1980년대의 유희적 작업과정은 윌렘 드 쿠닝 자신이 스스로 평생의 작업을 돌이켜보며 모더니스트 화가로서의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고 이를 통합, 정리, 발전시킨 결과물이라 봐야 할 것이다.

드 쿠닝의 치매와 작품변화의 관계성을 연구한 의사 에스피넬(Carlos Hugo Espinel, MD)은 치매 진행에도 불구하고 창의 영역을 계속 탐색했다는 점에서 윌렘 드쿠닝이 치매질환 환자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했다.[3] 특히 그는 드 쿠닝이 1981년에 아내 일레인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알콜, 우울증 약을 끊고 균형 잡힌 식사와 적당한 운동을 매일 한 후 작업을 재개할 수 있게 된 점에 주목한다. 알츠하이머가 진행성 질환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회복’ 양상은 알츠하이머로 인한 치매 이외의 영역일 것으로 추정되며 우울증과 여타 병인들로 인한 인지적 문제들이 건강한 생활습관으로 완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노인의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상태’를 가능한 오래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지키는 것인데, 치매는 그 독립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매우 큰 장애요인이며 다른 동반질환들로 인해 사망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뇌과학자들이 치매의 예방과 치료에 초점이 맞추고 있음에도 현재까지의 치료제는치매의 진행을 늦추는 정도만이 가능한 안타까운 실정이다. 제한적인 대상자들에 한하여 효과가 있는 치매약제가 개발되어 사용 중이지만 매우 고가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방이 어렵다는 점도 아직 치매 치료가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건강한 생활습관이 치매를 예방함을 알고, ‘인지기능장애’가 의심될 때 조기 진단을 받아 초기부터 약제를 꾸준히 복용하면 퇴행의 속도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비교하여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 치매는 암이나 심장병, 뇌졸중과 같은 큼직한 위험들을 넘어 초고령으로 가는 노인들의 마지막 고비이며, 오래 살다보면 결국 오게 되는 숙명 같은 질병일 수도 있다.

다만 드 쿠닝의 사례처럼 치매를 노년의 동반자로 수용하고, 그것이 가지고 오는 문제를 최소화할 방안을 강구하고, 현재 내 삶의 상태에서 가능한 최선을 이끌어낼 것을 새로운 목표로 가질 수 있다면 혹 노년에 인지기능이 감소하는 것을 경험하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나’의 인생을 최대한 누리는 모습은 치매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고 기다리는 노년보다 훨씬 가치 있을 것 같다.
[1] Clement Greenberg, “Review of an Exhibition of Willem de Kooning,” The Nation, April 24, 1948, repr. in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2, Arrogant Purpose, 1945–1949, ed. O’Brian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229.[2] T.J Clark et al, Painting from Memory: Aging, Dementia, and the Art of Willem de Kooning, Doreen B. Townsend Center for the Humanities, University of California (January 1, 1996) https://escholarship.org/uc/item/6w01q8n9#article_main

[3] Carlos Hugo Espinel, “de Kooning's late colours and forms: dementia, creativity, and the healing power of art”, The Lancet, Volume 347, Issue 9008, 20 April 1996, Pages 1096-1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