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악기(樂器)와 무기(武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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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대중의 자발적 추종 추구하는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 치하의 감옥에서 대학노트 서른두 권 2848페이지에 이르는 <옥중수고(Prison notebook)>를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집필한다. 요점을 백배 더 압축하면,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문화 지배에 의한 대중의 자발적 추종으로 전환하자’이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이론의 구약(舊約)을 세웠다면,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것의 신약시대를 연 ‘붉은 예수’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처럼
문학·영화·음악 등이 좌익의 무기로
대중화되지 못한 진실은 무기력
조작이 반복되면 거짓이 正史가 돼
이응준 시인·소설가
‘문화’가 좌익혁명의 최우선 무기가 된 것인데, 그 전략 전술이 전 세계에서 가장 히트를 친 곳이 바로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다. 십여 년 전 작고한 T선생은 대단한 인문, 역사 저술가이자 번역가였다.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그랬다. 386보다는 약간 윗 학번으로서, 대학 강단과는 거리를 두었다. 자칫 외로운 늑대처럼 보일 수 있었을 텐데도 늘 유머와 긍정이 넘치는 그의 태도를 나는 그의 실력만큼이나 존경했다.T선생은 요즘 흔한 약장수 스타일의 사이비 지식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평하는, 울긋불긋한 혀를 가진 ‘사특한’ 촉새 같은 모리배도 아니었다. 아무도 선동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나대지 않았다. 그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도 썼는데, 이런 부분이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6·25전쟁이 터지자 서울은 안전하다는 거짓 방송과 함께 한강다리를 폭파한 뒤 후방으로 도망쳤다. 한양을 버리고 몽진 끝에 중국 요동으로 망명하려던 조선의 임금 선조처럼.’ 그 책을 읽던 시절만 하더라도 이승만에 대한 내 소양은 보통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건대, 그랬던 나 자신보다 더 끔찍한 것은, T선생 같은 ‘훌륭한 지식인조차도’ 버젓이 저런 글을 쓰게 만들었던, 또한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짓들과 그 작동원리다.
무엇이든 조작된 채 세월이 흘러버리면 그 거짓은 정사(正史)처럼 굳어지는데, 그렇게 도둑맞은 진실을 되찾는 일은 박살이 난 유리잔을 원상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말과 글이란 허무하기는커녕 상상 이상으로 힘이 세다. 가령, 약산 김원봉이 드라마와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또 지난 정권에서 국군의 아버지로까지 추대될 ‘뻔했던 것’의 기조에는, 1984년 3월 30일 초판 1쇄를 찍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 167쪽에서 176쪽까지 겨우 10쪽 분량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름이 오른 권력자였다. 반면 다산 정약용은 정조 사후 핍박과 유배의 세월을 점철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책을 지었고, 그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글을 남기지 않으면 후세가 나를 권력자의 판결문으로만 판단할 터이니, 너희도 집필에 매진하라’는 당부가 눈에 띈다. 오늘날 ‘다산 콜센터’는 있어도, 우암의 이름을 딴 우체통이 하나라도 있다는 소리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람시의 ‘문화’는 이렇게 ‘역사’와 ‘미래’도 포괄한다. 왜곡과 무식을 지식처럼 악용해 상식을 뒤엎고 증오를 부추겨 조작된 과거로 현실을 지배하는 사례들은 끝이 없다. ‘건국전쟁’이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이 영화가 밝혀주는 이승만에 대한 진실들 중 여럿을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미 글로 써왔다. 하지만 ‘대중화되지 못한 진실’은, T선생조차 시대의 최면에 걸려 유포시킨 거짓 앞에서 무기력하다. 이승만을 중상모함해 대한민국을 쓰레기 취급하겠다는 게 ‘저들’의 목적이다. 그런데, 한 고독한 감독이 만든 2억원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이 그 거짓의 철옹성을 무너뜨렸다. 작가가 신념으로 작품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죽도록 싸우면 결국 세상을 이긴다는 풍문을 바위에 새기듯 증명했다. 건국 이후 기념비적인 사건이자 위대한 계기다.
대중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는 시점이 바로 ‘역사의 변곡점’이다. 그람시는 “위기란 옛것은 죽어가고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간에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고 말했더랬다. 거꾸로 되갚아줄 새로운 시대가 왔다. 거짓이 가득 찬 나치의 유대인 저주영상물 같은 ‘백년전쟁’은 이 사회의 병적 징후였다. 그런 것들을 선별해, 우리의 악기(樂器)인 ‘문화’를 무기(武器) 삼아, 멸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