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수장 "美 지원 있든 없든…유럽도 전쟁 채비에 나설 때"

폰데어라이엔 "유럽, 평화 환상 이젠 깨야
러 동결 자산으로 우크라 무기 지원 필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사진)이 “미국의 지원이 있든 없든,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기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유럽 국가 간 단결을 촉구했다. 서방국들의 제재로 동결된 3000억유로(약 434조원) 규모의 러시아 자산을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데 전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로뉴스 등에 따르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28일(현지시간) 유럽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러시아 자산에서 나온 ‘횡재이익’을 우크라이나를 위한 군사 장비를 공동 구매하는 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며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체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 돈을 잘 쓰는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활용할 방법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로 다음 날 나온 발언이다. 미국, 영국 등은 러시아 자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압박해 왔지만, EU 국가들은 러시아의 보복을 우려해 망설여 왔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어차피 (미국 등) 다른 국가의 선거 결과나 결정은 통제 밖에 있다”며 “동맹국들의 지원이 있건 없건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초래되는 ‘불안 비용’은 우리가 바로 지금 아낄 수 있는 돈보다 크며, 이것이 우리가 나서야 할 이유”라고 강조했다.
미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국내총생산(GDP)의 2% 미만을 국방비로 쓰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에 대해선 집단방위에 나서지 않겠다고 언급한 데 대한 반응이라는 분석이다. 이와 별개로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601억달러가 포함된 950억달러(약 127조원) 규모 패키지 예산안도 공화당 강경파의 반대로 하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유럽은 평화가 영원할 거란 환상 속에서 살아왔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평화 배당금’(군비를 축소해 경제 발전이나 복지에 사용할 목적으로 조성된 자금)을 악용했다”며 “그 결과 세계는 더욱 위험해졌다. 우리는 자유와 번영을 위해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그는 “전쟁의 위협은 임박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며 전쟁 채비도 촉구했다.

EU는 그간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무기 조달 자금으로 활용한 전례가 없다. 규정상 연구·혁신 외 군사·안보적 목적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어서다. 회원국들은 발이 묶인 러시아 자산의 사용 여부나 용처에 대해선 합의하지 않았고,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 예산으로 보관해두는 데까지만 공감대가 형성됐다. EU 집행위는 2주 내로 이에 대한 공식 제안서를 제출할 전망이다. 실행을 위해선 회원국들의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하다.

다만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두고 EU 회원국 간 갈등이 불거진 상황이어서 이행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상군 파견’ 가능성을 열어놓자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무기를 공급하면 된다”고 맞섰다. 파병을 단행할 경우 러시아와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규모가 유럽 최대 수준인 독일은 프랑스가 더 많은 예산을 써야 한다고 비판해 왔다.
이밖에 EU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기금인 유럽평화기금(EPF)도 역외 국가에서의 탄약 구매안을 두고 프랑스 등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몇 달째 개점휴업 상태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독일 재무장관은 G20 회의에서 기자들과 만나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제안과 관련, “법적으로 안전하고 신속하게 시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브루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라면서도 “러시아의 자산을 압류할 법적 근거는 없다. 국제법과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세계 최대 국제증권예탁결제기관인 유로클리어에는 현재 1910억유로(약 277조원)어치의 러시아 자산이 유가증권 형태로 묶여 있다. 유로클리어는 만기가 도래한 자산을 재투자해 연간 30억유로(약 4조3449억원)의 부가 수익을 창출한다. EU는 이자, 배당금 등 동결 자산에서 나온 초과 수익은 재건용 예산으로 활용하자는 데 이미 합의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