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명 이름 모를 재주꾼들의 조선판 '집단 지성'…5대 판소리의 비밀

[arte] 이자람의 소리 -작곡이랑 작창이랑 뭐가 달라요? (2)
존재하는 모든 글과 음악은 분명히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 전통 판소리 5대가* 또한 당연히 누군가가 글을 쓰고 그것에 장단과 선율을 입혀 만든 창작물이다. 그러나 이 전통 판소리 들은 명확한 작가나 작창가를 명기할 수 없다. 물론 ‘김연수 제’ ‘박녹주 제’ ‘박봉술 제’와 같이 근대 들어 여러 명창들이 그간의 전수 되어온 판소리 들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편집과 편곡 과정을 거쳐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유파를 새로이 정립하는 노력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판소리는 커다란 발전을 이루기도 하였다.

허나 그는 그 이전 세대의 소리꾼들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이미 창작되어 전해져 오는 거대한 각 작품에 창작을 보탠 것이다. ‘아무개 제’라는 4~8시간 가량의 전체 판소리의 모든 선율과 장단을 그 아무개가 온전히 창작했다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전통 판소리 5대가는 18세기에 태어나 19세기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소리꾼들과 패트런**의 협업으로 의해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퇴고와 편곡이라는 수정의 과정을 거치며 완성되어 왔기에 수백 명의 이름 모를 재주꾼들이 거듭해 완성해 온, 특정 창작자를 지목할 수 없는 조선 후기 창작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창작자들에 의해 지속적인 재창작을 거쳐오던 판소리는 1962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로 지정이 된다. 무형문화유산으로 지목된 이후 판소리는 이전의 편집과 수정의 미덕보다 보존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게 되며, 이로 인해 문화재의 소리를 올곧게 전수하는 것이 판소리를 잘 하는 일로 변화한다.

필자가 어렸던 시절, 판소리는 필자에게 ‘함부로 바꿔서는 안되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판소리 5대가를 배우는 과정에서 창작의 DNA도 함께 전수받은 모양인지, 판소리 수련을 거듭할수록 ‘현 시대의 언어로 된 나만의 판소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이러한 소리꾼은 전국 각지에 잔뜩 있다.)
이전 글에서 판소리가 7개의 장단과 하나의 선율, 그리고 이야기 부분인 아니리로 이루어짐을 밝혔다.

자, 그럼 이어서 판소리를 창작할 때 어떠한 과정들이 이루어지는지 나열해 보겠다. 먼저 하나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작가의 몫이다. 작가가 작창가에게 이야기가 쓰인 대본을 준다. 그 대본에는(드물게는) 아니리와 소리 부분이 나뉘어 소리 부분에 장단 표기가 되어 있기도 하고, 혹은 그저 아니리와 소리로만 나누어져 있기도 하다. 작창가의 창작 영역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작가가 내어준 대본의 소리 부분들을 (이미 장단이 지정되어 있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어떠한 장단으로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때 7개의 장단들이 그 속도와 뉘앙스에 따라 배치된다. 판소리의 장단은 단순하고 동일한 장단의 반복이 아니라 각 장단이 언어와 선율과 어떠한 합을 이루어 내며 이야기를 그려내는가를 음악적 특징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하루 이틀 장단을 배워서 그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장단이 가진 수많은 특징을 잘 살려 낼 수 있는 작곡가가 장단과 언어를 더불어 사고하며 다루어 내야 한다.


▶▶작창이랑 작곡이랑 뭐가 달라요?(1편)보기대본상에 장단이 배치되면 그다음은 각 장단에 맞는 선율을 만들어간다. 18세기 판소리에 주로 쓰이는 음계와 선율은 현재 우조 혹은 평조라 일컬어지는 음계와 선율이었으며,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계면조라 칭하는 음계가 두드러지게 많이 쓰였다. 각 악조마다 특정 음들이 주요음으로 쓰이며 각 음마다 다른 발성 기술을 쓴다. - 이게 무슨 소리인지 문자로 읽으면 어렵게만 느껴지겠으나, 지면을 통한 음악 구조 설명이라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설명을 시도해 보겠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계면조에서 주로 쓰이는 음은 ‘미, 라, 시' 이렇게 세 개의 음이며 ‘미’는 떠는 음으로 많이 불리고 ‘라’는 뻗는 음, ‘시’는 주로 바로 반음 위인 ‘도’에서 음을 꺾어내려오도록 불린다.

(이에 관한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예시는 진도아리랑의 후렴구이다. “아(떨고) 리(뻗고)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꺾고) 났 네”) 이러한 각 음의 성질은 각 음이 하나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때 또다시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진화한다. 문장이나 단어, 발성 방식과의 만남으로 하나의 특징적 표현방식으로 고유명사처럼 쓰이기도 하고 (이 경우의 예로는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얼씨구나 절씨구”라는 문장의 장단과 선율, 음 조합이 아주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이 문장은 모든 전통 판소리의 흥겨운 대목에 등장하며 모든 판소리 유파에서 90% 이상 동일한 선율과 장단으로 등장한다.) 특정 시김새***가 되기도 한다.

작창가는 노래를 작곡할 때 이러한 계면조의 선율 특성을 살려 극적 상황을 전달할 것인지, 그 외의 선율/음계 특성을 가진 우조나 평조로 곡을 쓸 것인지 혹은 각 지역 특색의 선율, 혹은 경드름이나 권마성과 같은 특정 선율형을 사용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고 결정된 각 악조(혹은 선율)의 특성 안에서 선율의 변주와 장단과의 조화를 살피며 곡을 써 나간다.

이러한 작창가의 작곡법은 판소리의 자장 안에서 서양의 작곡가가 행하는 일과 아주 동일한 작업 방식을 갖고 있다. 음악을 쓰게 될 장단(박자)을 정하고, 하나의 악조(조)를 선택하고 그 조 안의 음계를 따르다가 극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조를 하거나, 음의 복잡한 조합과 나열로 높은 기술을 요하는 특정 하이라이트 부분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현시대에는 필자를 포함한 많은 작창가들이 전통 판소리의 기본적인 음악 질서 위에서 여타의 음악 장르의 포용과 조화를 꾀하며 작창의 음악적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필자의 경우, 소리꾼이 무대 위에 고수와 단둘이 연행하는 전통 판소리의 양식에서는 전통 판소리의 음악적 질서 안에서 음악적 ‘깊이’를 모색하는 반면, 창극과 같이 여러 소리꾼과 여러 악기가 함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경우 서양의 화성의 개념과 더불어 ‘여러 음악 장르의 흡수와 조화’를 시도한다. 후자의 경우는 서양 작곡법의 작곡과 그 작업 영역이 교집합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마디로 판소리 작창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작품과 장르(1인 소리꾼의 판소리 양식일것인가 창극일 것인가)에 따라 그 개념을 무한하게 넓혀가고 있는 중이며, 기본적으로는 판소리의 자장 안에서의 전문적인 작곡법을 뜻하고 그 범주가 창극인가 창작 가무극인가 에 따라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작곡’의 개념을 포섭하기도 한다.

좋은 작곡이 무엇인지 함부로 단언하기 어렵듯이, 좋은 작창이 어떠한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필자가 판소리 창작에 임하는 음악적 노력의 방점은 판소리의 전통적인 음악 질서를 기본적으로 갖추되 이야기의 흐름과 진행에 따라 겁내지 말고 여러 장르로 뻗어나가 보는 실험에 있다. 틀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흐트러진 진열을 정비하고 다시 시작하면서 계속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창작자들의 기쁨이고 수고일 것이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patron. 조선 후기 예술 발달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예술후원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판소리꾼을 초청하여 공연을 벌여 소리꾼을 후원하는 동시에 청중에게도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점차 판소리에 자신들의 예술양식과 예술취향을 반영시켜 판소리의 재창작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김새란 판소리의 높은 음악성을 보여주는 기술들이다. 여러개의 음의 조합이 한 두개의 단어 표현에 사용 되어 빠르게 불리워 지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