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칼립투스 스피커, 흑단 턴테이블…오직 나무만이 만드는 위대한 소리

[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
쇼팽의 녹턴 그리고 24개 플레류드가 다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 앨리스 사라 오트와 일렉트로닉 뮤지션 올라퍼 아르날즈가 함께한 쇼팽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쇼팽을 만났다. 올라퍼 아르날즈의 고향 아이슬란드의 어느 콘서트 홀에서 자유롭게 녹음된 그들의 쇼팽 프로젝트는 재편집과 독창적인 믹싱으로 쇼팽의 음악에 새로운 음악적 영혼을 불어넣었다. 핑크 플로이드에게 알란 파슨스가 그랬듯, 쇼팽은 해체되고 다시 융합되었다.
올라퍼 아르날즈_앨리스 사라 오트
그런데 그 중심에서 앨리스 사라 오트보다 올라퍼 아르날즈의 천재적인 레코딩 아이디어보다 더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현악 사중주 멤버 중 마리 사무엘센의 바이올린 소리였다. 한 번 들은 이후 새벽에 잠든 이후에도 그 소리는 사그라들지 않고 귓전을 맴돌았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검색해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스트라디바리! 그 중에서도 1700년대 초반 제작된 빌레모뜨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소리였다. 영국에 있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수리·복원 회사 Florian Leonhard Fine Violins에서 흔쾌히 빌려준 이 귀중한 악기는 쇼팽 프로젝트에서 가장 뜨겁게 보잉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의 소리는 어떤 현대의 값비싼 바이올린도 흉내 낼 수 없는 공명을 일으킨다. 절대 따라할 수 없는 색채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와 나무 전문가들은 그 무엇보다 바디를 구성하는 나무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네덜란드의 어느 대학 연구진은 CT 촬영 자료를 바탕으로 그 균일하면서도 높은 밀도를 확인했다.

미국 텍사스 농공대학의 한 박사는 목재에 포함된 화학물질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고 테네시 대학 나이테 전문가는 나무의 나이테에 영향을 끼진 기후를 연역적으로 추론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스트라디바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특수한 기후 덕분에 생성된 특별한 구조와 그로 인한 독보적인 공명이 그 이유인 것으로 잠정적 결론이 났다. 이것이 정말 가장 정확한 결론인지는 나로선 확신하기 힘들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매우 힘든 자연의 힘이 이런 소리로 귀결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잠에서 깬 봄 어느 날 저녁, 녹음이 우거진 뒷산으로 걸어 나갔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생명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소나무, 밤나무, 감나무. 온갖 나무들 사이를 돌아오며 생긴 공명이 바람에 실려 귓전을 아스라이 지나친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삶은 온갖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무가 주는 과일과 나무가 주는 그늘, 그리고 소리 사이에서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국제 해양법엔 ‘사람이 살지 않고 물과 나무가 없으면 무인도’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곳엔 물과 나무가 있었다. 목재는 악기에도 자주 사용되지만 오디오 관련 기기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분야에 사용된 이유가 있다. 지금은 현대 하이엔드로 오면서 진동을 억제하기 위해 알루미늄, 카본 등 다양한 소재를 인클로저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목재가 대세다. 특히 턴테이블이나 카트리지 그리고 톤암 등에서 목재는 여전히 뛰어난 소재로 활용된다. 스피커로 가면 그 종류도 다양해서 MDF, HDF를 넘어서 자작나무나 아프리카 흑단도 활용된다. 몇 년 전엔 어느 스피커 메이커에서 코알라의 주식으로 알려진 유칼립투스를 표면 마감으로 활용한 적도 있다.

아날로그 장비 쪽으로 가면 카트리지 바디에 목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한 번 데논 DL-103이라는 MC 카트리지를 여러 번 사용했던 적이 있다. 일본의 데논에서 NHK와 공동 개발해 탄생한 카트리지로서 일명 MC 카트리지의 표준이라고 불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평탄한 사운드는 이내 질려버리곤 했다. 그 때 신박한 아이디어로 이 카트리지에 새로운 음악성을 부여해주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 씌워진 싸구려 플라스틱 케이스를 걷어내고 아프리카에서 자란 나무를 가공해서 만든 음핑고(아프리카 흑단 나무) 바디를 씌우는 것이다. 다부진 만듦새와 온기가 느껴지는 음핑고 바디의 촉감과 색감은 소리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실제로 벤츠 마이크로 같은 경우 하위 모델은 플라스틱 바디를 사용하지만 상위 모델로 가면 흑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데논 DL-103 음핑고 바디
최근 출시 50주년을 맞이한 영국의 대표적인 턴테이블 린 LP12, 일명 손덱은 유난히 플린스가 돋보인다. 일반적인 버전과 달리 디자인 및 내부 설계의 변경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베이스의 목재 소재가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너도밤나무를 고압으로 압착해서 만들었다. 무게도 늘어났을 뿐 아니라 짙은 색상 등 마치 대대로 이어져온 명품 같은 느낌을 준다. 50주년 기념작의 디자인은 바로 전 애플 디자이너였던 조니 아이브. 애플 기기 디자인에 대해 디터 람스로부터 재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던 바로 그 디자이너다.
린 LP12-50
노팅험 아날로그의 Anna Log 턴테이블도 너무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일단 턴테이블 바디, 즉 플린스 소재가 나무다. 마치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가보를 보는 듯한데 무려 250년 전 캐나다에서 수입한 자작나무 고목을 베이스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를 25mm 두께로 자른 후 수십 겹으로 붙여 만들었다. 수백 년 된 고목을 잘라 하나하나 접착 및 건조를 반복한 결과 Anna Log 의 베이스가 완성된다. 모두 공진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며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 자체의 잔향을 활용하겠다는 생각이다. 몇몇 하이엔드 스피커나 카트리지 제조사 또는 인슐레이터 등에서 아프리카산 흑단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접근이다.
노팅험 Anna Log 턴테이블-2
이태리 소너스 파베르도 대표적이다.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 등 악기의 이름을 딴 소너스 파베르의 스피커는 악기의 모양을 하진 않았지만, 그 못지 않은 뛰어난 소리를 들려주었다. 악기의 바디를 연상시키는 독보적인 짜맞춤 공법을 사용한 캐비닛이 소너스 파베르의 독특한 음색을 만들어냈기에 유난히도 아름다운 음악을 재생해준 것이다. 당시 악기 장인들의 이름을 붙여 오마주한 스피커는 하이파이 스피커를 단순한 음악 감상의 도구가 아닌 예술품,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는 역할을 했다.
소너스 파베르 Stradivari_Homage
혹시 건축 디자이너가 만든 스피커를 알고 있는가? 마치 그 생김새가 소리의 모든 것을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는 듯 온갖 소재를 모두 사용해본 우리 시대 최고의 건축 디자이너 장 누벨이 그의 스피커에 사용한 소재는 카본도 알루미늄도 아닌 무려 547겹의 나무였다. 장 누벨의 천재적인 창작력과 독보적인 디자인 그리고 Michael Deluc 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탁월한 엔지니어링이 결합해 필하모니아 스피커는 탄생했다. 무려 547겹의 나누 배니어를 고정밀 절삭하고 고밀도로 층층이 조립해 만든 모습은 감탄을 쏟아내게 한다.
스피커 제작 과정
스피커 인클로저 내부
나무는 여전히 숨쉰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 특성이 조금씩 변하며 그 시대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낸다. 어찌 보면 마치 사람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달라지며 최상의 목소리를 내는 황금기가 존재하며 이후 쇠락하듯 말이다. 스피커도 악기나 와인, 위스키처럼 몇 년산인지를 표기해놓으면 어떨까? 최근 와인 테이스팅에 참여했는데 2017, 2018, 2019년산 모두 각각 맛이 달랐고 가격도 달랐다. 오래되었다고 항상 맛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근 것이 더 나으리란 법도 없었다.

어쩌면 이런 자연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맛을 내면서 인간의 음악을 더 음악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나무로 만든 오디오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