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47만명' 쿠라시키에도 모네·고갱 작품이…日지방미술관도 亞최고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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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시는 문화전쟁중]④일본은 전국이 '문화천국'한국에 오는 외국인 다섯 명 중 네 명은 서울만 보고 돌아간다. 2위인 부산을 찾는 사람은 전체의 20%도 채 되지 않는다. 절반 이상의 관광객이 식도락과 쇼핑을 목적으로 오기 때문이라는 게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지난해 1~3분기 외래관광객 조사 결과다. 식도락과 쇼핑에서 수도인 서울을 이길 도시는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서울에만 관광자원 집중된 韓과 달리
전국이 미술품과 문화유산
공공이 빠진 빈자리 기업들이 메꿔
일본은 다르다. 최신 통계인 2019년 기준으로 방일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오사카(43.4%)다. 수도인 도쿄(42.4%)는 2위, 교토(32.8%)가 뒤를 잇는다. 각 지역별로 다른 분위기, 특히 문화유산과 예술을 즐기러 오는 관광객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는 게 미술관·박물관 방문객 통계다. 일본 문화청에 따르면 오사카 역사박물관 등 일본 관서지방 박물관의 외국인 관람객 비율은 30% 수준. 반면 한국은 전국에서 외국인 관람객 비율이 가장 높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최고 9% 수준이다.외국인 관광객들의 ‘일본 미술관 사랑’은 최근 찾은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에서도 눈과 귀로 느낄 수 있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클로드 모네의 전시 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긴 줄에서는 심심찮게 서양인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일본어 못지 않게 영어가 자주 들려왔다. 영국에서 왔다는 한 관람객은 “일본의 미술관은 좋은 작품이 많고 외국인이 둘러보기도 편해서 여행을 올 때마다 꼭 들른다”고 했다. 일본 간사이 지방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며 경쟁력의 비결을 현장 취재했다.
지방 미술관들도 亞 최고 수준
오사카의 대표 미술관인 시립 나카노시마 미술관과 국립 오사카국제미술관의 소장품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오사카국제미술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의 초대형 작품과 스페인 출신 거장 호안 미로의 대형 회화가 반겼다. 소장품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는 파블로 피카소와 앤디 워홀 등 거장들의 작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오사카국제미술관에서는 탁월한 시설 관리 수준이 돋보였다. 200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이 미술관은 2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직 새 것 같았다. 미술관 관계자에게 “항온·항습은 잘 되느냐”고 묻자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완벽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 제 2의 도시 부산의 최고 미술관인 부산시립미술관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2022년 물이 새는 등 부실공사 논란에 줄곧 시달리다가 현재 리모델링 공사에 돌입한 상태다. 오사카국제미술관보다 불과 6년 앞선 1998년 지어진 건물이다.대도시 뿐 아니라 중소도시 미술관도 소장품과 운영이 탁월한 수준이다. 쿠라시키에 위치한 오하라 미술관이 대표적이다. 쿠라시키는 일본 서남부에 있는 인구 47만여명의 도시로, 인구 수가 분당구와 비슷하다. 하지만 오하라 미술관의 근대미술 소장품은 서울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미술관 앞에 선 로댕의 조각상 두 점을 보며 “진짜 그 로댕 맞냐”고 묻는 한국인 관광객도 있었다. 이곳에 있는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와 모네의 ‘수련’, 고갱의 ‘즐거운 대지’는 미술사 전공자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해외 거장의 초고가 작품으로만 외국인 관람객들을 끌어모으는 건 아니다. 미술관과 박물관들에서는 전반적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특히 교토국립박물관과 오사카국제미술관 등에는 일본어와 영어는 물론 중국어와 한국어로도 작품 설명이 붙어 있었다. 교토박물관 관계자는 “2017년에는 외국인들을 위해 화장실 비데의 그림을 더 쉽게 바꾼 적도 있다”며 웃었다. 이처럼 온갖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10여년 전 10% 이내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외국인 관람객 비율이 지금처럼 올라올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키워드는 ‘민간 주도’
일본 미술관과 박물관이 이 같은 경쟁력을 갖추게 된 주요 원인으로는 ‘민간 기업들의 참여’가 꼽힌다. 유카 우에마츠 오사카국제미술관 큐레이터는 “‘버블경제’ 이후 미술관·박물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확 줄었는데, 기업들이 대신 도와준 덕분에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인 교토의 교세라미술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교토시립미술관’이었다. 하지만 2020년 증·개축을 거쳐 다시 문을 열면서 교세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토 지역의 기업인 교세라는 그 대가로 50억엔(약 433억원)을 냈다. 홍보 효과와 지역사회 공헌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노렸다. 나오시마에 미술관들을 세운 베네세홀딩스 역시 바다 건너 지역인 오카야마에 본사를 두고 있다. 오하라 미술관은 쿠라사키 출신의 기업인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지었다.민간이 미술관과 박물관 운영에 개입하면서 뜻밖의 효과도 생겼다. 기업의 효율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수익 창출 노력을 기울인 결과 흑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사카 시 출연 재단과 민간이 공동 운영하는 나카노시마 미술관은 2022년 개관 첫해 코로나19 사태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나는 수익과 맞은 편 가구점이 지불하는 임대료 수입의 영향이 컸다. 일본 카레 냄새가 풍기는 레스토랑 앞에는 평일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가구점 역시 손님들로 북적였다.교세라미술관도 2층을 대관 전시로 개방하는 등 수익 창출에 파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달 찾은 이곳에서는 중노년층 미술 동호회의 정기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규모 전시 말미에 있는 박물관 샵에서 수백만~수천만원대 판화를 판매하고, 이 판화 중 상당수가 매진된 것도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오사카·교토·쿠라시키=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