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전주곡 하나로 생각해 보는 영화 '추락의 해부' 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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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동조의 나는 무대감독입니다라떼를 즐기는 나이에 이른 이들에게 빈번히 소개되곤 했던 교양 도서 중에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의 도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있다. 이 책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구절은 ‘낭만주의’를 다루는 장에서 ‘형식 해체’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다. 잠시 인용해본다.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란 현실을 실체가 없고 본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일련의 기회로, 정신적 생산성을 위한 단순한 자극으로 분해하는, 즉 현실을 오직 주체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본질성을 확인해보기 위해서만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상황으로 해체하는 관점이다. 그 자극들이 더 모호하고 분위기를 중시하며 ‘음악적’일수록 체험하는 주체가 겪는 반응의 진폭은 더욱 격렬하며, 또 세계가 파악 불능이고 변덕스럽고 실체가 없으면 없을수록 자신의 타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자아는 더욱 강하고 자유롭고 자율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인용하는 구절을 잘 이해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현실’이란 단어를 ‘음악’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가끔 ‘세계’라는 단어 역시 ‘음악’으로 대체해서 생각해 본다면 그건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왔다. 클래식 음악 혹은 음악을 사랑하는 본질을 지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기쁨 중 하나는 아마 세상의 모든 일을 음악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던 그 찰나를 기억하며 마음속에 고이 모셔놓은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념 속에 살고 있지만, 입 밖으로 그 단어를 표현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처럼, 음악을 입고 먹고 사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음악이념’ 혹은 ‘음악주의’라는 태도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들 그건 아마 자신들만이 소중히 간직하고 견지하는 자세일 것이다. 다만 음악을 통해 기꺼이 무언가를 즐길 수 있는 모호한 순간들이 찾아올 때, 그건 격렬한 기쁨의 순간이며 그 기쁨이 주는 진폭을 자유롭게 만끽하고,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자신만의 방식에 대한 자율성 그리고 타당성을 공고히 하는 기회로 전환하고, 끝으로는 그 과정을 통해 정신적 생산성이 증대하고 있음을 깨달을 줄 아는 능력을,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수상하기도 했던 세계적 권위의 칸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2023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 『추락의 해부』에 등장하는 쇼팽의 작품번호 28 『전주곡』중 제4번을 듣는 순간, 이 영화는 혹시 종교와 수난과 한 성인에 대해 모호하지만 격렬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깊숙이 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 2분 남짓의 짧은 마단조의 작품 하나가 지닌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매력에서 온 것임을 잘 설명하고 싶어졌다.
1. Chopin Preludes Op.28-4 그리고 Bach B-minor mass 중 Crucifixus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정념’이란 단어의 정의다. ‘감정’에는 ‘생각’을 더하고, ‘생각’은 ‘음표’로 바꾸면 그것이 혹시 작곡가의 길이 아닐까 농담처럼 생각해 본다. 사람이 지닌 보편적인 정서라 할 수 있는 ‘슬픔’. 슬픔이란 정서가 마음에 일어나는 과정은 언어가 아닌 음들의 결합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또는 슬픔을 나타내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음들의 결합은 과연 있었을까를 궁금해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또한 꾸준히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본 후 마주하게 된 한 글에서 위 두 개의 작품을 비교하고 있는 부분을 보게 되었다. 글이 지닌 ‘어조’처럼 음악은 ‘정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위 두 개의 작품은 모두 ‘비가(悲歌)적’인 정념을 지니고 있다는 언급을 했다.
두 음악은 마단조로 조성이 같으며, 반주하는 리듬은 쇼팽은 8분음표 8개 2/2박자, 바흐는 6개의 4분음표 3/2박자를 사용하며, 양 작품 모두 반음씩 하강하는 저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위 오른손과 성악을 통해 펼쳐지는 선율에 사용되며 역시 반음 하강하는 두 음인 ‘도’와 ‘시’. 그 두 음은 역시 양 작품 모두에서 선율적 동기가 되어 있다는 주장 역시 내세우고 있다. 균일한 속도와 박자로 하강하며 선율을 받치는 왼손과 통주저음이 표현하는 음형은, 선율을 만들며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역시 하강하는 오른손 및 목소리의 음형과 함께 슬픔을 표현하는 데 있어 탁월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쇼팽과 바흐의 두 음악에 차이가 있는 곳은 가사. 두 마디에 걸쳐 5개의 음표로 ‘도’에서 ‘시’로 내려오는 바흐의 작품에는 ‘십자가에 못박힌’이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다. 비가적인 정념에서 그 정념을 조금 더 구체화하는 바흐의 음악. 아들이 처음으로 연주하는 쇼팽의 전주곡 마단조. 그 선율에 십자가에 못 박힌 성인의 모습을 홀연히 연상한 이 있지 않았을까? 분명 있었을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간 알지 못했던 부모의 뒷이야기들을 듣게 되는 아들. 인간이 발전시켜온 논리의 장이며 아울러 인간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한 처벌 및 형벌까지 내릴 수 있는 법정. 그곳에서 듣게 되는 마치 아들에 대한 고해성사 같은, 불어와 영어로 번갈아 표현되는 엄마의 대사. 방청석에 앉아 재판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지켜본 후 그 모든 것을 종합한 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주말의 시간 동안 ‘혼자서’ 최후의 증언을 준비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피아노에 앉아 다시 그 쇼팽의 전주곡을 연주한다.
2. 아들의 두 번째 연주에 떠오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 3악장
2011년 2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 리사이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마지막 세 곡이 휴식 없이 연달아 연주되었던 이 공연에 청중으로 참여했다. 당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진행했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에 대한 강의와 연주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열심히 듣고 또 들으며 이 연주회에 참여했다. 그 강의 중 세 작품의 마지막 악장들에 대한 설명이 특히 좋았는데, 피아노 소나타 제31번 마지막 악장 역시 마찬가지였다.피아노 소나타 31번 3악장의 강의에 대해 잘 잊히지 않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도입부→서정적인 선율→첫 번째 푸가→서정적인 선율→두 번째 푸가로 간단히 표현해 볼 수 있는 악장의 구조에서, 푸가가 시작하기 바로 전 서정적인 선율의 맺음 부분에 바흐의 작품인 『요한 수난곡』 중 알토 아리아 <성취되었다>(Es/ist/voll/bracht)의 음들을 베토벤이 두 번 모두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다. 또 다른 기억은 첫 번째 서정적인 선율의 시작에 붙은 악상 기호다. ‘슬프게 노래하듯이’ 정도로 번역해볼 수 있는 < Arioso dolente >라는 악상 기호 외에 특별히 < Klagender Gesang >이라는 표현이 하나 더 있음을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는 설명했다. ‘탄식의 노래’라는 우리말이 붙은 이 구절. 『요한 수난곡』에서 말하는 수난의 성취라는 것은 성인이 죽음을 맞이한 일이며, ‘탄식’은 그 성인을 떠나 보낸 슬픔을 표현하는 말일 테다. 악장이 시작하고 아홉 마디에 시작해서 푸가가 시작하기 전까지 18마디를 진행하는 ‘탄식의 노래’.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균일한 박자와 리듬을 표현하는 16분음표로 구성된 셋잇단음표 그리고 역시 그 위로 천천히 하강하는 오른손으로 표현하는 탄식의 노래 첫 음형이 쇼팽의 전주곡 마단조 그리고 바흐의 ‘십자가에 못박힌’과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아니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3악장이 시작한 후 9마디째 시작되어 첫 푸가가 시작되기 전까지 18마디를 진행하는 ‘탄식의 노래’. 한 종교의 성인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해골 터’라는 언덕을 올라 온갖 핍박과 박해를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이 성취되는 그 익숙한 광경. 필자는 이 18마디로 구성된 ‘탄식의 노래’가 그 광경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음악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노래의 앞 다섯 마디에는 계이름 ‘라’를 연속으로 28번을 치도록 작곡한 베토벤. 다양한 악상 기호에 더해 피아노 페달에 대해 꼼꼼한 지시까지 내리고 있는 이 한마디는 그 자체로 듣는 눈물 같기도 하며, 두 번째 푸가 앞에 붙은 건반으로 표현한 10번의 종소리. 그 종소리에 이어 바로 등장하는 마치 성인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듯한 푸가. 조금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 3악장 전체는 하나의 소(小) 수난곡 같다.
영화에서 가장 간담 서늘한 장면은 역시 아들이 자신의 증언 속에 아버지의 자살을 암시하는 대사를 하는 부분일 것이다. 얼굴은 아버지 목소리는 아들이 동시에 연기하고 있는 이 장면은, 성인이 모진 심문을 받으며 받는 질문과 답인 “네가 민족의 왕이냐?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를 ”아빠가 그렇게 말했습니다.“로 바꾸어 결국 그 아들이 누군가의 죄를 사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그 아들이 신의 작은(小) 아들이라는 하나의 결론을 유도해 볼 수 있는 일. 바흐와 베토벤 그리고 쇼팽의 세 작품에 대한 경험이 내게는 이 결론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신처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영화에 사용된 또 하나의 음악인 ‘아스투리아스’. 클래식 음악회 현장에서 기타 연주로도 많이 접하게 되는 이 피아노 작품이 지닌 정념은 무엇일까?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억누르기 힘들었던 단어는 ‘미궁’이었다.
미로가 아닌 미궁. 미로와 미궁 모두 복잡하지만, 미로는 선택지를 지녔고 미궁은 목적지가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그 차이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히는 그 순간에 이르는 과정을 다시 한번 돕고 있는 음악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