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앵들은 120년 전 파리 지하철역을 '괴물'이라 불렀다

[arte] 조새미의 공예의 탄생

아르누보 I 행복하고 평등한 미래를 위한 희망의 예술
프랑스어로 ‘아르(art)’는 예술, ‘누보(nouveau)’는 새롭다는 의미의 아르누보는 1880년대에 등장해 1914년까지 풍미했던 장식미술 양식이다. 장식미술은 건축물, 기물 등 실용품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행하는 조형예술이다. 그 범위는 복식, 장신구에서 기물, 벽면 장식, 문양, 가구, 책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다.

서양의 장식미술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과 이후 그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왕가의 취향을 반영했지만,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예술이 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로움을 맞이하게 되었고, 대중교통과 대중매체 시스템이 출현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첫 영화를 상영했고, 1878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 미국 보스턴에서 최초의 교환국을 통해 전화 통화를 성공시켰으며, 1885년에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가 등장했다. 세상의 변화는 일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확장된 생활, 매체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르누보는 중산층의 번영, 자유로운 행복 추구라는 대중의 욕구와 구매력과의 상호작용을 살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벨기에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화가이기도 했던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1863-1957)는 화가였으나 미술공예운동의 주창자인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영향으로 장식 미술 분야로 전향했던 인물이다. 그는 유연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1894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아르누보에 관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장식적 작품의 배후에는 행복하고 평등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공공 조형

파리를 여행할 때 지하철 입구 조형물과 반드시 조우하게 되는데, 이는 아르누보의 상징물과도 같다. 런던에 이미 지하철 시스템이 건설되어 있었기에 파리가 지하철 시스템을 구현한 최초의 도시는 아니었지만, 1900년 파리 박람회를 위한 효율적이고 매력적인 대중교통 수단에 대한 필요성으로 메트로 건설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지하철 공사(Compagnie du Métropolitain)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파리 시민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메트로 입구 디자인 공모를 시작했다.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는 표준화된 주철 조형물을 유닛으로 제작해 제조, 운송 및 이동, 조립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창의적인 계획이 있었다.
<그림 1- 엑토르 기마르, 메트로 조형물- 아베스 역, In Wikipedia>
기마르는 공모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디자인이 모듈화되어 있어 조합을 달리하면 설치 장소의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었고, 주철 조형물에 청동 파티나처럼 보이도록 유사한 색을 페인트로 도포했다.

다시 말해 기마르의 디자인은 상대적으로 더 경제적인 계획이었다. 전체적인 형태에서 가느다란 곡선은 덩굴을 연상시켰고, 두 개의 고정된 줄기에서 신비로운 식물이 자라나 표지판을 고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호난간 부분은 곤충의 날개가 방패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미래주의적 느낌의 구조물이 하나의 유닛을 이루었다. 이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그림 2- 엑토르 기마르, 메트로 조형물(부분), By GFreihalter, In Wikipedia>
일부 전문가들은 기마르의 현대적인 모듈식 디자인을 칭찬했지만, 대다수의 파리 사람은 튤립 모양의 조명을 괴물의 눈과 비슷하다며, 또 '메트로폴리탄'이라는 글자의 가독성이 낮다며 불평했다. 그들은 기마르가 기존의 고급 보석 및 장식적인 가구에 적용했던 조형 언어를 메트로 입구와 같은 공공 조형에 적용한다며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1913년, 141개의 메트로 입구를 위한 조형물이 파리 전역에 설치되었을 때 아르누보가 대중문화 영역에 성공적으로 침투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림 3- 엑토르 기마르, 메트로 게이트, 초기 엽서(바스티유 역, 철거됨)>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마르의 조형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고, 20세기 초에 이르자 철거 압력을 받기 시작해 1942년, 기마르 사후 대거 철거되었다.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을 포함하여 지금은 약 88점만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록펠러 조각 정원(Abby Aldrich Rockefeller Sculpture Garden)에 설치된 것으로 이 조형물은 원래 파리 바스티유 지하철역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아르누보 양식은 1960년경부터 대중문화 속에서 급속하게 확산된 아르누보 리바이벌을 계기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1960년 《아르누보: 세기 전환기의 미술과 디자인 Art Nouveau: Art and Design at the Turn of the Century》와 1970년 《엑토르 기마르 Hector Guimard》를,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은 1960년 《20세기의 근원: 1884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의 예술 The Sources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Arts in Europe from 1884 to 1914》을 개최했다. 기마르의 업적은 다시 마땅한 찬사를 받게 되었고, 파괴했던 부분의 금형을 다시 제작해 재설치하는 등 공적인 영역에서 복원되었다.

그래픽

아르누보에서 가장 대중 친화적이며, 직관적인 의사소통의 기술을 요구했던 분야는 그래픽이었다. 특히 포스터는 거리에 배포되어야 했기에 다량 생산해야 했고, 행인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고혹적이어야 했다. 일본 우끼요에(浮世絵)의 영향을 받은 포스터 분야는 나름의 방법론을 개발했다. 도시의 거리에서 행인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뚜렷한 이미지와 간결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선의 리듬, 색, 윤곽을 강조한 이미지, 화면 구성과 조화로운 타이포그래피 등이 고안되었다.
<그림 4- 알폰스 무하, JOB 담배 종이 광고 포스터, 1898,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런던 >
체코에서 태어난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는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를 위한 포스터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면서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무하의 디자인은 이상화된 세기말 여성의 이미지를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꿈과 무의식, 최면술 등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포스터 속 인물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 5- 알폰스 무하, JOB 담배 종이 광고 포스터, 1898, In Wikipedia>
무하의 대표작 중 하나인 < JOB >은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 같지만, 실상은 담배 마는 종이의 상업 광고 포스터였다. Job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설립된 회사로, 롤업 담배(Hand-rolled cigarettes)를 말기 위한 종이, 사용자가 취향에 따라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향료나 색소 등을 첨가한 제품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상품을 생산했다. 19세기 당시에는 증기 동력을 사용해 기계를 운용했으며, 1865~66년에는 석판화 제작과 인쇄를 위한 작업장도 설치했다. 1890년대 후반 회사는 광고 포스터를 디자인하기 위해 무하를 포함해 다수의 예술가를 고용했다. 이 포스터 이미지는 석판화로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lt;그림 6- 오브리 비어즐리, &lt;‘달 속의 여인', 및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묘사한 작품)', 1894년, John Lane 출판, 런던, 1907년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런던&gt;
영국 출신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 1872-1898)의 작품 또한 아르누보 그래픽의 걸작이다. 그는 폐결핵으로 25세에 요절했음에도 아름다우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그래픽을 다수 제작했다. 월간지 <스튜디오> 창간호에 그의 작품이 특집으로 개제되었는데, 아일랜드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희곡 『살로메 Salomé』(1894)를 위해 그려진 삽화 ‘나는 너의 입술에 입 맞췄노라’라는 삽화가 특히 큰 관심을 끌었다. 이 삽화는 흑백으로 제작되었고, 공중에 떠 있는 살로메가 피를 흘리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이미지였다. 자극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은 논란을 일으켰다. 1894년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더 타임스(The Times)는 “환상적이고,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고, 혐오스럽다”고 비판했고, 또 다른 이들은 “광기 어리고 음탕하기 때문에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만을 위한 것”이라 비평했다.
&lt;그림 7- 오브리 비어즐리, &lt;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묘사한 작품&gt;, 1894년, John Lane 출판, 런던, 1907년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런던&gt;
그러나 비어즐리의 작품이 자극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삽화를 담은 책을 출판했던 존 레인(John Lane) 출판사는 당시의 혁신 기술인 선 목판(Line-block)과 같은 실험적 인쇄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에 훨씬 경제적인 방법으로 책을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공예의 탄생>은 다음 연재에서 아르누보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