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계 노벨상' 수상 日 9명 vs. 韓 0명… 왜 이런 차이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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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리켄 올해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건축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올해 수상자로 지난 5일(현지시각) 일본의 야마모토 리켄(79)이 선정됐다. 미국 하얏트재단이 1979년 제정한 이 상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실력 있는 건축가들만 받을 수 있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일본인이 이 상을 받은 건 아홉 번째. 이로써 일본은 미국(8명)을 제치고 가장 많은 수상자를 낳은 국가가 됐다.이 소식을 들은 한국 건축계에서는 탄식이 나왔다. 이번 수상으로 인해 한 번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9대 0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리켄이 누구길래 이 상을 받은 걸까. 일본은 왜 이렇게 프리츠커상을 많이 받을 수 있었나. 한국에서는 왜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걸까.
日, 美 제치고 최다 수상 국가로 등극
일본 건축가들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 적극적
한국은 트렌드 흡수 늦고 '각자도생' 분위기
‘투명성’으로 소통 추구
의외로 리켄의 이름을 아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가 설계한 아파트와 타운하우스가 국내에 있어서다. 판교의 타운하우스인 월든힐스 2단지(2011년 입주)와 서울 세곡동 아파트 보금자리 3단지(2013년 입주)가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두 건물 모두 완공 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현관문을 유리로 만들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파격적인 설계 때문이었다. 사생활 침해와 보안 문제 등 논란이 일면서 판교 타운하우스는 초기 미분양 사태를 겪었고, 세곡동 아파트는 현관문에 불투명 시트지를 추가 시공했다.이런 문제가 뻔히 예상됐는데도 리켄이 도발적인 설계를 밀어붙인 건 그의 건축의 핵심 철학이 ‘투명성’이라서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전통 건축물은 외부와 연결돼 있었다. 한옥으로 따지면 마당이나 마루와 같은 공간을 통해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식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주택은 ‘밀실’ 처럼 변했다. 그 탓에 이웃 간 소통이 실종되면서 공동체의 결속이 약화됐고, 많은 사회 문제를 낳았다. 그러니 공용 공간을 늘리고, 때로는 공간 일부를 투명하게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만들고 서로간의 소통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예컨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히로시마의 소방서(2000년)는 7층짜리 유리 상자처럼 생겼다. 소방관들이 일반 사무를 보거나 출동하는 모습을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소방관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지역사회가 잘 보고 감동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됐다. 고시가야의 사이타마현립대학 캠퍼스(1999년) 역시 소통을 강조한다. 9개의 건물은 모두 통로로 이어져 있고, 공간 대부분이 유리로 구성돼 있다. 전공이 다른 연구자나 교수들 간에도 활발히 소통하고 협업하게 하기 위해서다.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는 리켄의 이런 철학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리켄은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이어주는 건축가이자 사회 운동가”라는 평가다. 리켄의 건축이 소통을 증진시키는 효과도 실제 입증됐다. 미분양 위기를 겪었던 판교 타운하우스가 그랬다. 2020년 이곳 주민들은 건축가에게 “이웃 간 소통이 늘어서 행복하다”며 감사 메일을 보냈고, 이에 감동한 리켄은 방한해 주민들과 만남을 가졌다.전문가 분석 "한국 공공 건축, 아직 멀었다"
리켄은 니혼대 건축과를 졸업한 뒤 도쿄예술대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73년 건축사무소를 연 국내파다. 일본인 최초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단게 겐조를 필두로 일본 건축계가 확 튀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정립한 자신의 건축 철학을 50여년간 고수해왔다. 최근 하얏트재단은 리켄처럼 꾸준히 자신만의 철학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쳐온 건축가들에게 프리츠커상을 주는 추세다. 지난해 수상자인 데이비드 치퍼필드와 재작년 수상자 프란시스 케레도 공공 건축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았다.이런 추세를 감안하면 한국인 건축가의 프리츠커상 수상은 한참 멀었다는 평가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건축물 대부분은 공공 건축인데, 한국의 공공 건축 관행은 엉망이라는 게 국내외의 일관된 평가라서다. 한 건축가는 “서울 한 구청의 건축 공모전에 설계가 당선된 적이 있는데, 담당 과장이 ‘구청장 취향대로 설계를 바꿔 달라’고 해서 황당했다”며 “정치인이나 지자체장의 치적이 될 수 있도록 겉보기에 멋지면서도 무조건 싸고 빠르게 지어달라는 요구가 많다”고 토로했다.근본적인 원인은 “한·일 양국 간 건축을 바라보는 철학의 차이”(정진국 한양대 건축학부 명예교수)에 있다는 분석이 많다. 화려한 건축물은 사치로 여겼던 유교 전통, ‘빨리 많이’ 짓는 게 목표였던 고도 성장기 등의 영향으로 아직도 건축을 예술로 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첫 번째. 두 번째는 한국 건축계 특유의 폐쇄적인 분위기다. 정 교수는 “일본 건축가들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이고, 일본인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가 강하다”며 “반면 한국 건축가들은 세계 무대에서의 네트워킹과 트렌드 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강하다”고 했다.유현준 건축가는 “프리츠커상은 단순히 한 건축가가 받는 상이라기보다는 그 나라의 문화수준에 주는 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성수영/안시욱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