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구멍 뚫린 간첩법에 기승 부리는 산업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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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년간 기술유출 피해 26조“한국은 명백한 산업 스파이의 타깃입니다.”
솜방망이 처벌에도 법 개정 밀려
김동현 정치부 기자
최근 기자가 만난 정보당국 관계자는 이같이 단언했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 경쟁력 발표에서 한국의 ‘특허 출원·등록’ 건수는 64개국 가운데 4위, 인구 10만 명당 특허 출원 건수는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세부 항목을 살펴보면 ‘지식재산 보호’ 순위가 28위에 그쳐 유독 뒤처졌다.실제로 보안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산업 스파이의 수법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교묘해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고액 연봉을 미끼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기술 인재를 빼내는 것은 이미 낡은 것이 됐다. 사모펀드를 통해 기술 보유 회사나 모회사 지분을 확보해 기술을 빼돌리거나 산학협력 공동 연구를 빙자해 연구소를 설립한 뒤 이를 기술 수집 거점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동원된다. 전문리서치 혹은 컨설팅 업체에 거액의 비용을 지불한 뒤 합법적인 것처럼 기술정보를 수집하는 수법도 쓰고 있다. 그 결과 최근 5년간(2019~2023년) 국내 기술의 해외 유출 피해는 26조원(국가정보원 추정)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산업 스파이에 대한 사법당국의 처벌 수준이 낮아 산업 기술 유출 피해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평가한다. 기술 유출 범죄에 가장 많이 적용되는 ‘산업기술보호법’의 법조문만 놓고 보면 기술을 해외로 빼돌렸을 때 최대 15년까지 징역형 선고가 가능하다. 하지만 법정에서 실제 선고된 형량은 징역 1~2년, 집행유예 등이 다수였다. “기술 유출로 얻는 이득이 적발 시 손해보다 훨씬 큰데 스파이들이 가만있겠냐”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기업들은 현행 간첩죄를 산업 기술 유출 시도에 대해서도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적국을 위한 간첩행위’만 처벌하는 조항은 ‘외국을 위한 간첩행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 법 개정안은 2022년 발의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에서 잠자고 있다. 법사위 관계자는 “일부 의원이 ‘국가기밀의 폭을 좁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신중론을 들고나와 법안 관련 논의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5월 말로 21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면 해당 법 개정안은 추가 논의 없이 폐기된다.
국내 기술 유출의 최종 경로는 중국이 대다수란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은 미·중 갈등으로 반도체 등 국가 전략산업의 기술 확보가 어려워지자 한국 미국 등에서 기술과 인재를 빼가고 있다. 이런 중국도 자국의 기술을 유출하면 ‘신방첩법’(반간첩법 개정안)으로 엄격히 처벌한다. 정치권은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면서 해외 스파이를 막자는 것이냐”는 하소연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